분노하라!
읽을거리/인문 2011. 5. 10. 18:44[출처] 한겨레 / 원문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6874.html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14건
분노하라!읽을거리/인문 2011. 5. 10. 18:44
5월6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서울지역 한 고등학교의 ‘성적 카스트’ 기사를 읽으면서 떠오른 게 “분노하라!”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이 최근에 펴내 인구에 회자된 책 제목이다.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분노의 능력을 인간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의 하나로 꼽았는데, 우리가 분노를 잃으면 그 당연한 귀결로 앙가주망(참여)도 함께 잃는다고 경고한다. 젊은 시절에 분노 때문에 저항운동에 참여했다는 그가 93살에 이른 오늘 “분노하라!”고 선동적인 책을 펴낸 것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더욱 벌어지는 간극, 날로 추락하는 인권과 지구 전체의 상황 때문이다. 아직 인간이어서일까, 전교생을 “알짜(1~50등), 예비(51~100등), 잉여(101등 이하)”로 구분한다는 기사 앞에서 나는 분노에 떨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 한국판 5월호는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특집을 꾸렸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프리모 레비의 “이게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할 지경에 이른 듯하다. 르디플로 특집에 실린 “등록금은 미치지 않았다. 뻔뻔할 뿐”이라는 글처럼, 우리가 흔히 미쳤다고 말하는 교육도 뻔뻔하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른다. 분노할 줄 모르는 토양에서 피어오르는 게 뻔뻔함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인간적 횡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더욱 거세진 경쟁과 효율의 구호는 이미 “교육의 목표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있다”거나 “학교는 더불어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라는 수사조차 지워버렸다. ‘선택과 집중’은 본디 인간인 학생이 적성과 능력에 따라 학과목을 선택하여 집중한다는 뜻인데, 이젠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여 ‘알짜’만 집중하여 특별반을 편성하고 각종 특혜, 심지어는 교사 선택권까지 주고, 나머지는 ‘예비’하거나 ‘잉여’로 내버린다는 뜻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율학습실과 기숙사를 성적에 따라 자격을 주고, 좌석 배치는 물론 사물함, 책상 크기, 컴퓨터 설치 등 각종 학습 환경에서까지 차별하고, 성적 우수자에게만 토론대회 참가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곳이 아닌 학교에서!
이런 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익힐까? 지독한 ‘지적 인종주의’를 학습하여 차별과 억압을 내면화하고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선택되지 않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가령 ‘뻔뻔한’ 대학등록금 문제에 당사자인 대학생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 진입한 학생들에게는 대물림 구조에 의해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점과 함께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의식이 작용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중하위권 대학의 학생들은 지적 인종주의에 의해 버림받아 주체화에 이르기 어렵다는 게 작용한다. 선택된 자든 버림받은 자든 인간성 훼손의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진보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듯이 인간성의 훼손도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조금씩 추락할 때 분노할 줄 몰라 익숙해지면 다시 또 추락하고 또 익숙해지면서 기어이 파국에 이르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에게 “이게 인간인가”라고 묻게 한 나치즘도 그런 경로를 밟았다. 특목고 우대와 자사고 확대, 고교선택제, 수능성적 공개, 학교 줄 세우기와 국민세금 차등 사용 등 경쟁만능주의 교육정책들이 하나하나 수용되고 익숙해지면서 마침내 학생들을 ‘알짜, 예비, 잉여’로 나누는 괴물학교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곧 저항이며, 저항하는 것, 그것이 곧 창조다”라는 말로 끝맺는다. 나는 먼저 서울시민들에게 모레(5월11일) 마감되는 학생인권조례 발기인 서명에 동참해달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우리 학교가 조금이라도 덜 흉물스럽게 하기 위해.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출처] 한겨레 / 원문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6874.html 인문학은 포장용이 아니다읽을거리/인문 2011. 5. 10. 18:42
지난 3일 교육과학기술부와 부산시, 유네스코가 공동으로 여는 세계인문학포럼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협약식이 있었다. 협약식에 참석한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행사 뒤 부산지역 고교생들을 만나 ‘인문학 토론’을 했다. 이 장관은 입학사정관 제도에 대해서 물었고, 토론은 그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인문학을 주제로 교과부 장관이 청소년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입학사정관 제도의 우수함에 대한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 청소년들의 대답은 냉혹했다. “진정한 삶의 가치와 자기실현을 가르치는 인문학 교육이 부재한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허울뿐인 제도를 신뢰할 리 만무하다.
지난 6일치 <한겨레>가 보도한 바와 같이, 일부 학교는 성적 우수자들을 ‘글로벌 리더’로, 이외의 아이들은 ‘비(非)글로벌 리더’로 분류한다. 성적이 최상위인 학생들에게는 <교육방송>을 볼 수 있는 컴퓨터가 제공되고, 책상과 사물함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넓고 좋은 것으로 제공된다. 출석번호와 자리 배치도 시각적으로 자극을 받도록 성적순으로 매긴다. 말도 안 되는 학교의 차별대우에 ‘글로벌 리더’반 아이들은 그들의 무리에 속하지 못한 친구들을 ‘글로벌 쓰레기’라 부른다.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는 분노로 몸이 떨린다. 도대체 이러한 교육 방식은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 도대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 싶은 것인가?
더 뼈아프게 슬픈 것은 부정의한 대우 속에서도 청소년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이 아름답고 좋은 세상인지 배운 적이 없어서 그 꿈을 제대로 꾸지도 못한 채 그들이 경험할 실패와 좌절을 상상해 보았는가? 또 이러한 과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실제로 글로벌 리더가 된다면, 그 세상은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이 용납되는, 사람을 쓰레기 취급해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끔찍한 세상이 될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금 당장의 입시 성과에 목매달며 미래에 대한 한 치의 고민과 성찰도 없는 경쟁교육 주범들의 무지함과 무감함은 가히 살인적인 공포로 다가온다.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니 “10억원을 준다면 10년을 감옥살이해도 좋다”는 청소년의 비율이 30%가 넘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10년을 감옥살이할 만큼의 범죄보다 돈 없고 학력 낮은 것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12년 동안 배우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무서운 현실을 ‘글로벌 리더’ ‘인문적 소양’이라는 말로 포장하지 말라. 솔직하게 ‘글로벌 지배자’ ‘이기적 전략’이라는 표현으로 그것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는 훨씬 도움이 된다.
11월에 교과부가 연다는 세계인문학포럼은 ‘다문화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를 주제로 한다. 수백명의 국내외 석학이 참석하는 대규모 공론의 장은 인류 공통의 보편적 가치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교육의 수장인 교과부가 펼칠 글로벌 인문학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불평등한 구조에서 주어진 기회와 특권을 당연하게 자기의 것이라 여기는 사람을 글로벌 리더로 키우는 것처럼 보편적 가치의 탈만 쓴 채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면 인문학포럼이라는 이름을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인문학은 명백한 불의에 대한 저항의 언어이자, 모든 종류의 불공정에 대한 전복의 도구이다. 세상의 그늘진 곳들을 분명히 직시하고 낮은 곳을 향해 온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를 위한 인문학이다. 그렇지 않은 보편적 가치의 모색은 실패가 불 보듯 뻔하다.
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출처] 한겨레 / 원문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7073.html 공동체 되살리는 SNS읽을거리/사회 2011. 5. 10. 18:41
사회과학 200년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뭐라 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공동체가 사라지고 그 빈 자리를 어떻게 국가와 시장이 채워나가는가에 대한 기록이다”라고. 이렇게 보면 사회과학 내부 분파들 사이의 차이 정도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공동체를 몰아낸 자리에 들어선 시장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말하면 아담 스미스가 되고, 그것이 얼마나 계급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말하면 카를 마르크스가 된다. 국가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적 기구인지를 말하면 알튀세가 되고, 그것의 관료적 작동양상에 주목하면 막스 베버가 된다. 하지만 작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통점은 공동체가 사라지고 국가와 시장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내년 선거 ‘소셜 정치’ 뚜렷해질 것
‘나’와 ‘너’ 사이에 ‘우리’가 있다. 거기야말로 공동체의 자리이다. 공동체는 ‘나’와 ‘너’의 단순 합이 아니다. 시장이 갈라놓은 ‘나’와 ‘너’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가려는 이기적 개인들일 뿐이지만 ‘우리’는 미래와 환경과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우리 모두의 운명을 염려한다. 국가의 감시와 통제에 짓눌린 ‘나’와 ‘너’는 한없이 작은 납세자일 뿐이지만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국가를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같이 꾸는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공동체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소중하다.
나는 작년 11월 이 지면을 통해 트위터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경향신문 2010년 11월11일자 정동칼럼). 신자유주의 시장의 거센 파고와 지난 몇 년간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심각하게 후퇴시킨 국가의 강압 속에 멸종된 줄 알았던 ‘우리’가 트위터와 같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난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재·보선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내년 양대 선거에서는 더욱 커질 것이다. 되돌아온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정치적 공동체의 귀환이다. 내년 선거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소셜 선거가 될 것이고, 정치적 공동체가 멸종위기에 처한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던 사람들로서는 두려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표의 크기로 보면 최소 10퍼센트 내외의 유권자가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SNS ‘홍보’ 아닌 ‘소통의 장’ 돼야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끝자락을 감지한 것일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SNS를 활용해 정부정책을 홍보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하고, 며칠 전부터 트위터에 국무위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통위는 소셜플랫폼 전략이란 것을 발표하면서 이름도 어려운 ‘인포데믹스(왜곡된 정보의 확산)’를 차단하겠다고 나섰다. 천당 바로 아래에서 패배한 강재섭 후보의 “특히 SNS를 조심해야 한다”는 경험담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재·보선 선거운동이 시작될 무렵 20퍼센트 이상 앞선다고 조사되었던 강원도에서조차 패배한 것도 공포감을 키우는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SNS는 홍보의 장이 아니라 소통의 장이고, 인포데믹스가 아니라 집단지성의 장이며, 조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감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되살리고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부여당은 아직도 변화의 끝자락밖에 붙들지 못한 것이다. 불리하기 때문에 홍보와 규제와 차단을 하려 한다면 사태는 점점 더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자신들이 대표하도록 되어있는 유권자를 제대로 대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누누이 말하지만 정치와 권력이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않을 때 뉴미디어는 ‘대표되지 않은 자의 무기’가 된다. 트위터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정치가 마주해야 할 것은 어제의 패배적인 ‘너’와 ‘나’가 아니라 주권자의 자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한 ‘우리’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42105095&code=990308 손안의 바보상자읽을거리/인문 2011. 5. 10. 18:39
스마트폰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었고, 올해 말에는 200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모바일 인터넷의 확산은 일상의 풍경을 빠르게 바꿔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하철이다. 무가지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그 대신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게임부터 정보 검색과 영화 감상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사이버 세계에 잠겨 있다. 이동하면서도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으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스크린 앞에서 보낼 것이다.
스마트폰은 아이들 놀이 욕구도 바꿔놓고 있다. 아빠의 스마트폰을 갖고 놀기 위해서 아빠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자녀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노출되는 연령이 점점 낮아진다. 시중에 이미 여러 가지 육아용 애플리케이션이 보급되고 있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개발된 것이 많다. 심지어 0세용 프로그램도 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본 장면이다. 어느 주부가 유모차에 아이를 앉혀 놓고 무슨 재주로 아이를 재미있게 해주는지, 깔깔 웃는 소리가 꽤 멀리까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스마트폰을 아이의 눈앞에 고정시켜 놓고 어떤 단순한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중에 본 장면도 떠오른다. 어떤 주부가 만 한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스마트폰을 열어 어떤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멋진 봄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데 차창을 커튼으로 가려놓은 채.
스마트폰에 길들여지는 아이들
무엇이 문제인가. 어른은 편하고 아이는 재미있어 하니 그것으로 좋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다. 어른도 디지털 신호에 너무 노출되면 생각하는 힘이 떨어지고 매사에 쉽게 싫증과 짜증을 낸다. 그리고 타인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지능과 감성이 퇴화된다. 임상심리학자 콕스는 말한다. “이야기를 읽고 듣는 경우와 달리 쉴 새 없이 퍼붓는 전자적 자극은 심층 청취 기술이나 폭넓은 감정표현 능력을 저해한다.” 아이들에게 그 폐해는 훨씬 치명적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똑똑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이 오히려 아이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게 들이대는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전자적 자극은 매우 현란하기 때문에 시선을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아이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듯 보이지만 그냥 수동적으로 홀리는 것일 뿐이다. 시선은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고 두뇌는 단순한 반사작용만 거듭한다. 거기에 길들여지면 오프라인 상태에서는 주의력 결핍증에 빠지기 쉽다.
아이들의 발육과 성장에 필요한 것은 유기적인 경험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표정을 읽으면서 상호작용하는 것, 울퉁불퉁한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질감을 느끼는 것, 이러저러한 공간을 탐색하면서 신체 감각을 익히는 것, 자연의 알록달록한 풍경을 자유롭게 관찰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 이 모든 것이 이른바 인성교육의 필수 아미노산이다. 창의성을 증진시키는 바탕이다. 청소년의 게임 중독 내지 과몰입으로 많은 부모와 교사들의 고민이 깊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영아기부터 전기 자극을 쏟아붓는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불빛을 향해 하염없이 달려드는 나방의 수준으로 두뇌를 퇴화시킨다고 할까. 얄팍한 심성은 작은 난관에도 좌절하고 극단적인 선택으로 치닫곤 한다. 눈길 닿는 곳마다 영상으로 도배된 생활환경 속에서 어른들도 단세포 동물처럼 되어가며 그러한 상황에 둔감해지는 듯하다.
감성 메마르고 창의성 계발안돼
사람은 심심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무료함 속에서 마음의 부피가 자라나고 문화가 생성된다. 안에서 솟아오르는 힘으로 인간은 자신만의 탄탄한 삶을 창조해갈 수 있다. 자아 형성의 공간을 다양하게 열어놓을 때, 아이들은 자기를 정당하게 사랑하며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무의식과 즐거운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세계와 자유롭게 교섭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여백을 허락하자.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눌 일이며, 주변의 사물들에 물음표를 달며 손짓할 일이다.
김찬호|성공회대 초빙교수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51925495&code=990000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읽을거리/인문 2011. 5. 10. 18:34
ㆍ무상의 표상, 백골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왜 악한 사람들이 잘살죠? 잘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주변에서 보면 악착같이 돈만 아는 집요한 사람들이 잘사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사람이 돈도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니? 그건 잘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기를 쓰고 이악스럽게 사는 거잖아. 각박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다쳐야 해. 그게 좋니? 문화철학 시간에 한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악착같이 살지 않으면 악착 같은 세상 견디기 힘들 거라는 마음에 힘이 붙을 때는 어떡할까요? 그런 마음이 찾아들 때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이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저 그림을 처음 보면 촛불이 가르는 명암 때문에 왼손을 턱에 괸 채 작은 촛불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시선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러나 저 그림에 사로잡히면 곧 저 그림의 정신적 힘은 해골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저 그림의 매력은 마리아의 오른손에서 옵니다. 해골을 만지고 있는 오른손에 한 치의 두려움도 없지요? 해골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해골로 흐르고 있습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 1640~4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8×94㎝, 루브르 박물관, 파리
마리아가 해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촛불에 씻긴 눈으로 내면을 응시하면서 홀연한 지혜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해골로 상징되는 무상(無常)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무상의 표상인 해골이 무섭지 않은 마음을,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로 정화의 의식을 올리는 영혼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막달라 마리아는 열정적으로 예수를 사랑한 여인입니다.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긴 여자이고,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경험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던 그때 그 순간을 경험한 여자지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충만한 사랑의 힘을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 교감의 경험이 마리아에게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을 응시할 수 있는 내공을 길러준 게 아닐까요? 그나저나 그녀는 무엇을 참회하고 있지요?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해 또 진정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늘 열정이 빗나가기만 했던 시간들일 겁니다. 예수를 만나 깊은 사랑에 감동받은 그녀는 이제 열정이 고통이 되고 있는 그녀 같았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깊은 사랑에 이르는 지혜의 향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사랑은 하릴없이 짧았습니다. 부활한 예수가 어디에도 없으니 무상한 사랑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무상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기지요? 젊음은 왜 이리 짧고 사랑은 왜 그렇게 빠르게 가냐고 탄식하게 되는 겁니다. 마리아는 다릅니다. 짧은 순간에 평생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마리아는 무상을 받아들이고 있어 무상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요. 책상 위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를 사랑한 여자 막달라 마리아가 나와도 저 그림은 불교적입니다.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실제로 남방불교에서는 해골을 앞에 두고 관(觀)을 합니다. 관(觀)이란 보는 것입니다. 보긴 보는 건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것을 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무시무시한 백골을 앞에 두고 관을 하지요? 백골이 무서운 것은 백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백골은 나의 미래이고, 나는 백골의 전생입니다. 살아보면 산 게 없는 백골 같은 인생, 백골 위에 손을 얹고 기원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학벌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제력일까요? 혹 무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지혜인 것은 아닐까요?
슬픔이 밀려들 때는 해골을 만지고 있는 저 그림을 보십시오. 그러면 영혼의 촛불이 지금 내가 고민하는 문제가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를 밝혀주면서 문제를 객관화시켜줄 것입니다.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81917115&code=990000 ‘원전 폐기’ 강력히 요구한다읽을거리/사회 2011. 5. 10. 18:29
지난 1995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구환경정치론’이란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수업시간에 가장 심각하게 강조한 것은 핵발전소 문제다. 이 주제를 마무리할 때면 항상 ‘예언’한 것이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핵발전소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에서 일어날 확률이 아주 높다는 얘기였다. 삼풍백화점 및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보여줬듯이 한국이 거대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내 나름대로의 분석 때문이었다. 내 예측의 절반은 빗나가버렸다. 일본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폭발 및 붕괴 사건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일본의 기술과 관리능력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간 후쿠시마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과 담론이 쏟아져나왔지만 거기서 한국 사회는 별다른 ‘학습’을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핵발전소 폐쇄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어야 하는데 예상외로 조용하다. 기껏해야 핵발전소 21기의 안전문제를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 사회에서 ‘원자력’이라는 그럴 듯한 번역어로 포장된 ‘핵(nuclear)’에 대한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안면도·부안 등지에서 일어났던 방폐장 설치 반대운동이 그 근거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핵’에 대한 신화도 뿌리깊다. 핵무기가 있으면 왠지 든든하고 또한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핵무기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이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핵발전소에 대한 기대와 과신으로 이어져왔다. 이 뒤에 정부, 핵 관련 과학자·전문가 집단, 주류언론 간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동맹이 존재한다고 봐야 할까. 그 동맹에서 유포하고 있는 핵발전 관련 담론은 단순하다. 원자력은 ‘청정 에너지’이고 안전하며, 비용이 싸고 그것을 대체할 에너지가 현실적으로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믿음에는 과학적, 경제적 근거가 얼마나 있을까?
이필렬 교수의 지론처럼 핵발전소의 안전에 관련된 장치가 수없이 많다는 사실은 바로 그만큼 그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다. 비용이 싸다? 1㎾/h를 생산하는 데 드는 현재 비용은 원자력이 수력이나 화력에 비해 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비용에는 사용 후 폐연료 처리, 고준위와 중·저준위 폐기물 처리 및 저장(고준위 폐기물을 안전하게 영구히 저장하는 방법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수명이 다한 원자로 해체, 주변 환경 복구 비용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대형 사고로 인한 비용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재생에너지가 비현실적인 대안일까? 물론 단기간에 원자력을 재생에너지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수명이 다하는 대로 원자로를 하나하나 폐기한다면 장기간에 걸쳐 ‘탈핵사회’를 이루는 것은 가능하다. 산업화의 수준이 한국보다 결코 떨어질 리 없는 독일에서 2050년까지 현재 24.4%에 달하는 원자력 의존도를 0%로 떨어뜨리고 재생가능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83%까지 올리는 계획을 세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에 폭발 25주년을 맞은 체르노빌 발전소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현재 원자로를 봉인한 시멘트 덩어리에서 균열이 생겨나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또다시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80만명이 피폭된 체르노빌 사건에서 배우지 못한 것처럼 한국도 후쿠시마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일본의 반핵발전 시위에서 나왔던 구호가 머릿속을 맴돈다. “(원전 폐기를) 강력히, 강력히, 강력히 요구한다!”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81922325&code=990000 ‘실패할 권리’ 없는 사회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38
이 땅의 아이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꼭 지켜줘야 할 권리가 있다. 방황할 권리, 실패할 권리다. 사람은 누구나 방황하고 좌절하면서 성장한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의 문턱에 오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실패에 대해서 가혹하다. 한 번 넘어지면 낙오자, 패배자가 되고 만다.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몇 해 전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참석해 자신의 도전과 실패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혼모였던 생모는 잡스를 대학에 보내주는 조건으로 양부모에게 맡겼다. 약속대로 양부모는 잡스를 대학에 보냈지만 잡스는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지 확신이 없다며 6개월 만에 자퇴했다. 그는 친구 집에서 잤고, 빈 콜라병을 모아 병당 5센트에 팔아서 먹을 것을 샀다. 공짜 밥을 먹기 위해 10㎞를 걸어 힌두교 교당까지 찾아갔다. 대신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 잡스가 매료된 것은 서체였다. 그는 매킨토시 컴퓨터가 미려한 서체를 가지게 된 것은 자신 덕분이라고 했다.
잡스가 늘 성공만 했던 것은 아니다. 창업 10년 만에 애플은 20억달러짜리 회사가 됐지만 잡스는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그가 영입한 동업자들과 불화가 생겼고, 이사진은 창업자인 잡스를 쫓아냈다. 잡스는 “돌아보면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다. 성공이라는 부담을 벗고 홀가분하게 초보자로 다시 돌아가 내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접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잡스는 이후 픽사를 창업했고 세계에서 가장 큰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는 잡스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아무리 창의적이고 천재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대학 중퇴자에게 밑천을 대줄 사람도, 아이디어를 사줄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떠받들고 있는 신념은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승자독식의 논리다. 개혁이란 이름을 내건 것들을 들여다보면 우수 인재, 좋은 성과를 위해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 일색이다. 그러다보니 초등학생도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열 살 때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대학이 결정된다는 무섭고 섬뜩한 말까지 나돈다. 부모들은 자식의 미래를 위한다며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뺑뺑이’ 돌린다. 중학교에서는 특목고 경쟁을 벌이고,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하면 취업원서조차 얻기 힘들다. 대학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보다 성적 우수자에게 장학금을 주고, 오갈 곳 없는 지방 학생 대신 성적 우수자에게 기숙사를 제공한다. 모든 것이 승자 우선이다.
이런 극심한 경쟁에서는 승자도 위태롭다. 올해 초 목숨을 끊은 카이스트 학생들도 고교 때까지는 모두 승자였을 것이다. 이들은 초·중학교에서 ‘경쟁의 사다리’ 맨 앞자리에 올라서 과학고에 진학한 수재였다. 로봇영재였다는 학생은 영어·수학 점수는 다른 학생보다 뒤질지 모르지만 로봇대회를 휩쓸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생에게 “늘 배고픈 채로, 늘 어리석은 채로 남으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한 번 실패에 낙오자가 되기 십상인 사회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것은 ‘실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두 번 세 번 도전할 기회가 없다면 누가 실패를 무릅쓰고 어려운 길, 배고픈 길을 갈 것인가. 도전은커녕 모두가 이기는 길, 안전한 길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는 방황과 실패도 권리여야 한다. 방황과 실패가 트라우마가 아닌 인생의 자산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최병준|사회부 차장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42121475&code=990000 부자와 빈자의 돈에 대한 욕망읽을거리/경제/경영 2011. 5. 9. 19:37
부산저축은행 대주주들이 고객의 돈을 사금고처럼 이용하며 무분별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사업을 병행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그 사건에 대한 철저한 규명과 단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를 무수하게 목도해 왔는데, 수십조원을 가진 재벌가가 증여세와 상속세를 면탈하기 위해 물의를 일으키거나, 소득세를 탈루하고 기업의 자금을 유용해서 개인의 잇속을 차리는 장면들이 그것이다.
재벌, 한없는 욕심은 결국 재앙으로
이쯤에서 우리는 ‘그 정도의 부를 축적한 사람이 왜 더 많은 부를 욕심내는 것일까?’라는 철학적인 의문을 한번쯤 가져보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이에 대해 ‘부 그 자체가 아닌 성과에 대한 욕구’라고 설명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답이다.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욕망하는 것은 ‘화폐의 추상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돈은 ‘노동가치를 축적하는 수단’이고 언제든지 재화로 교환될 수 있는 유동성이다. 물론 여기서 노동가치설의 맹점을 지적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어쨌거나 돈은 노동을 저장하고, 저장된 노동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일 대신, 문화나 여가를 즐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때 저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노동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반대의 사유, 즉 돈을 노동가치로 환원하는 것에는 상당히 서툴다.
이를테면 마늘밭에서 나온 100억원은 5만원권 지폐로 20만장이고, 어느 재벌가의 일원이 가진 1조원은 5만원권 2000만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보유한 부를 이렇게 환원해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만약 이만한 돈을 재화로 보유하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1조원의 부는 라면 20억개, 우유 10억ℓ에 해당한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그가 세금 100억원(라면 2000만개)을 아끼기 위해 탈세를 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다시말해 큰 부자가 단순히 계좌상의 숫자나 장부상의 기호가 아닌 실제 화폐나 재화로 부를 가지고 있다면, 일정 수준 이상 돈이 늘어나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재앙이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돈은 단지 숫자로만 표현된다. 숫자로 보면 1조원의 돈은 단지 12개의 ‘0’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화폐의 추상성은 상대적 결핍감을 유발한다. 내가 가진 1조원은 다른 이가 가진 13개의 ‘0’에 비해 초라하고, 또 다른 14개의 ‘0’에 비하면 아쉽기 그지 없는 숫자인 것이다.
재화로 환원해서 생각해 볼 때,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이 화폐나 재화로 바뀔 가능성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돈을 추상화된 숫자로 보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돈의 본질인 셈이다.
서민들은 생존 위한 처절한 욕구
이와 반대로 빈자가 가진 돈은 처절하다. 그가 가진 돈은 기본적으로 화폐로 바꾸거나 재화로 바꾸기에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빈자의 돈은 항상 재화로 환원돼 사용되어야 하므로. 그가 가진 부에 대한 열망은 기본적으로 생존욕구와 거의 일치하게 된다.
전자의 욕망이 상대적 욕망이라면, 후자의 욕망은 절대적 욕망인 셈이다. 이렇게 부에 대한 같은 욕망이지만 절대적, 상대적인 본질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인간은 원래 ‘욕망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더 많은 부를 추구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의 전제,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우리를 모두 탈인간적인 함정에 빠지게 하고 만다.
결국 빈자의 절대적 욕망은 탈진한 여행자가 사막에서 만난 한 방울의 이슬이지만, 부자의 상대적 욕망은 소금물을 들이켜는 하마와 같은 것임에도 이것을 동일선상에서 맥락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 혹은 시장자본주의의 두 얼굴인 셈이다.
박경철|의사·경제평론가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51930055&code=990000 ‘쥐그림’으로 대변되는 언론·표현의 자유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34
최근 국제언론자유 감시단체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가 세계 각국의 언론자유 수준을 조사해 ‘2011년 언론자유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한국을 부분적 언론 자유국(partly free)으로 평가했다. 한국은 지난 2009년에는 언론자유국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올해 조사에서는 부분적 언론 자유국으로 그 지위가 떨어졌다. 이는 한국의 언론 자유가 2009년 이후 후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리덤 하우스의 ‘2011년 언론자유 보고서’는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보인 나라로 한국과 태국을 꼽았다. 보고서는 한국이 그동안 언론자유국으로 분류돼 있다가 이번에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강등됐다고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가장 먼저 정부의 검열과 감시 증가로 언론매체의 뉴스와 정보 콘텐츠에 대해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온라인상에서 반정부적 시각의 글들이 본인의 동의 없이 삭제돼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보수성향의 이명박 정부가 언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측근들을 주요 방송사 사장에 임명해 방송사 경영에 개입함으로써 언론자유를 침해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번 ‘2011년 언론자유 보고서’의 국가별 평가내용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언론자유 지수는 조사 대상 196개국 중 70위를 차지해 동유럽의 체코, 폴란드, 헝가리, 남미의 우루과이와 칠레,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더 낮은 수준이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기준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장한 국가라도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를 민주국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다양한 형태로 침해를 당하고 있다. 지난해 G20 정상회담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은 한 대학강사가 검찰에 의해 기소돼 징역 10월을 구형받았다. 검찰은 피고인에게 실형을 구형하면서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했다”며 엄중처벌을 요구했다고 한다.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은 것이 어떻게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했다는 것인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필자는 쥐 그림을 그려넣은 포스터를 보면서 기발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당했다는 생각은 단 1%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해봤다. 만약 그 대학강사가 G20 홍보포스터에 쥐가 아닌 토끼나 강아지 등 다른 동물의 그림을 그려넣었어도 검찰이 기소에 실형까지 구형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같은 대학에 재직 중인 미국인 교수들에게 얘기를 해주고 의견을 물었다. 모든 교수들이 포스터에 그림을 그려넣었다는 이유로 검찰이 기소를 하고 실형까지 구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놀라워했다. 미국의 코미디언과 방송 진행자들은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유력 정치인들과 정부정책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과 풍자를 쏟아낸다. 그러나 누구도 그 비판과 풍자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말로만 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표현과 언론의 자유 보장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정부당국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최진봉| 텍사스주립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51929065&code=990303 나는 검사다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33
어제 서울중앙지검이 농협 전산망 마비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담당 부장검사인 첨단범죄수사2부장이 6층 브리핑실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곁들여 설명했다. 사진·방송카메라 촬영도 허용했다. 배포한 보도참고자료는 ‘용어 설명’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미장센’(무대장치·조명 등에 관한 총체적 계획)에 비해 결론은 시원치 않았다. 검찰은 “북한에 의한 새로운 사이버 테러”라고 하면서도, 구체적 근거에 대해선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이라 밝히기 곤란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저께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와 관련, 대주주 등 21명을 기소했다. 중수부는 세 가지 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다양한 그래픽을 담은 21쪽짜리 설명자료에 3쪽짜리 ‘피고인별 공소사실 요지’, 5쪽짜리 ‘SPC(특수목적법인) 운영현황’까지 내놨다. 내용은 몰라도 형식은 ‘프레스 프렌들리’였다.
지난달 15일 서울중앙지검이 한상률 전 국세청장 관련 의혹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는 조금 달랐다. 브리핑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2시30분, 3차장검사 사무실에서 티타임 형식으로 이뤄졌다. 보도자료 한 장 주지 않고, 사진·방송 촬영도 사절했다. 브리핑 말미엔 이런 문답이 오갔다. 앞의 질문은 기자, 뒤의 답변은 3차장검사가 한 말이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건도 카메라 돌아가고(촬영하고) 하는데, 이렇게 티타임 형식으로 하는 이유는 뭔가.” “나도 제대로 된 사건으로 (브리핑)하고 싶다.”
“전직 국세청장이 기업에서 돈 받았다면 중요한 사안인데.” “글쎄.”
“금요일 오후에 발표한 이유는 뭔가.” “굳이 금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없다.”
유리하면 ‘확대’ 불리하면 ‘축소’
검찰의 의도는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발표는 하지만 관심은 갖지 말아달라…. 일부 개인비리만 인정해 불구속 기소하고, 권력형 비리엔 모두 면죄부를 준 채 어물쩍 수사를 종결하려니 계면쩍었을 터다. 딱딱한 뉴스가 잘 먹히지 않는 주말,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한상률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서 ‘한상률’은 조용히 잊혀졌다.
한상률 사건 수사결과가 발표된 날, 조현오 경찰청장의 서면진술서가 검찰에 도착했다. 조 청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가 지난해 8월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됐다. 검찰은 조 청장에 대한 조사를 8개월간 미뤘다. 주임검사는 사건을 그대로 쥐고 있다가 지난 2월 정기인사 때 다른 곳으로 옮겼다. 노무현재단이 해당 검사를 직무유기죄로 고발한 뒤에야 검찰은 “조 청장으로부터 서면진술서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1995년 6년차 기자 때 처음 접한 검찰이나 16년 후 데스크가 되어 바라본 검찰이나 다른 것이 없다. 조직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정권의 뜻에 민감한 속성은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검찰은 변하지 않는다고, 시민이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검찰의 기소권은 시민이 편의상 위임한 것이지, 검사들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는 최근 대검 중수부의 수사권 폐지와 특별수사청 설치 등 검찰 개혁안 처리를 6월 임시국회로 넘겼다. 수뇌부 집단사퇴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반발하던 검찰은 안도했다. 참다못한 시민사회는 “더 이상 검찰 개혁을 국회에만 맡길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115개 시민사회단체가 ‘사법개혁 촉구 인권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이제,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후퇴하지 않으려면,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다. 단순히 중수부 수사권 폐지나 특별수사청 설치 등 한정된 의제를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넓게 검찰 개혁을 논의해야 한다. 검찰 권한을 지역·기능에 따라 분산시키는 방안, 일부 간부를 선거로 뽑아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 법무장관 등 법무부 주요 간부에 비검찰 출신 법률전문가를 기용하는 방안 등도 검토할 수 있다.
요즘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인기다. ‘가수는 가창력으로 말한다’는, 당연하지만 현실에서 외면당해온 명제가 명제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검사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 서초동에 있는가.
김민아 사회부장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31856055&code=990000 시민의 새로운 각성 보여주는 ‘통신생협’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29
인천의 시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휴대폰 통신비의 불합리한 시장구조를 혁신하려는 대안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오는 16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통신 소비자생활협동조합(통신생협)’이 공식 출범할 예정이라는 보도다. 통신 3사의 독과점 구조에서 잃어버린 소비자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피켓을 드는 대신 생협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구상이다. 통신생협은 식품·의료 부문에서 세를 넓혀온 생협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확산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통신생협 준비위원회는 기존 통신비를 30~40%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생협이 나서 불필요한 통신서비스의 거품을 걷어내고 통신 3사와 공공구매·직거래를 터 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항의하거나 불매하는 기존 소비자운동과 달리 경제행위를 통해 ‘시민 소비자’의 욕구를 해결하는 생협의 방식이라면 기대해 볼 만한 목표다. 2004년 이탈리아에서 생협이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맞서 반값 분유를 시장에 내놓았고, 1970년대 일본에서 컬러TV에 잔뜩 낀 가격 거품을 걷어낸 일등공신이 생협이었다. 통신생협는 태동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자율과 자립, 자조와 협동의 원리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의 대안적 영역인 생협에 대해 시민의 눈길이 쏠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불편한 현실을 개탄만 해선 안되겠다는 시민의 새로운 자각과 생협에 대한 재발견이 맞물린 결과라 할 수 있다. 최근 젊은 인디 음악인들이 대자본이 쥐락펴락하는 음악시장에 맞서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만든 것이나 협동조합에 뿌리를 둔 사회적 기업의 창업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해법 모색이 본격화한 것이다.
주주의 지갑이 아니라 공동체의 부를 늘리는 협동조합이 활발할수록
시장은 안정되고 민주주의와 공동체는 강화되며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건 입증된 사실이다.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하나같이 생협 천국이고, 미국조차
각종 협동조합의 조합원 수가 1억2000만명에 달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생협 조합원 수는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시민의
경제·사회·문화적 욕구 충족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서도 생협은 더 많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 통신생협을 계기로 우리나라 생협운동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출처]경향신문 2001년 5월 5일자 사설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52055325&code=990101 삼성이 중소기업과 '동반 성장'하려면읽을거리/경제/경영 2011. 5. 4. 18:01
우리나라 대기업은 크게 둘로 나뉜다. 삼성과 그 외 다른 대기업들이다. 지난해 삼성그룹 매출액은 220조원이었다. 몇 개 대기업이 합쳐야 삼성과 덩치가 비슷하다.
삼성 임원이나 CEO는 아주 많은 급여를 받는다. 예를 들어 지난해 삼성전자 이윤우·최지성 부회장과 윤주화 사장이 받은 연봉은 평균 60억원 선이다. 올해는 3년에 한 번 주는 성과급이 포함되는 해인 만큼 연봉 70억원에 성과급 50억원을 따로 받을 예정이다. 한 달 월급만 10억원인 셈이다. 물론 스톡옵션은 따로 받는다. 삼성의 여타 계열사 CEO의 처음 연봉도 10억원을 훨씬 상회한다.
다른 대기업들은 임금에서도 삼성과 비교가 안 된다. 지난해 LG전자에서 삼성전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3명의 사내이사 연봉은 약 10억원이었고, 올해는 12억원 수준이다. 단순하게 비교한다면 삼성전자 등기이사의 한 달 월급이 LG전자 CEO의 1년 연봉인 셈이다.
월급이 많으면 세금도 많이 내니 애국하는 것이다. 다만 삼성과 다른 대기업들 간 격차가 너무 커서, 전경련 내에서조차 "삼성이 사회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삼성의 임금 시스템에서 성과급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성과급은 이익이 많이 나고 매출이 늘어나야 받을 수 있다. 삼성 CEO나 임직원들이 성과급을 많이 받으려면 비용을 줄이고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 따라서 삼성은 구조적으로 '상생(相生) 경영' '동반 성장'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기업이다. 하도급 업체를 쥐어짜야 임원이나 CEO가 돈을 더 받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올해 화두를 '동반 성장'으로 정하고, 회의 때마다 상생을 강조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삼성은 기술이 괜찮은 벤처기업을 만나면 우선 전속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매출을 보장해주다가 시간이 지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원가 절감을 요구한다. 단가 인하 압력에 시달리던 협력업체는 회사를 삼성에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만약 협력업체가 원가 절감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높은 연봉을 제시하고 협력업체의 핵심 기술자들을 빼가서 회사를 하나 차린다. 어떤 경우든 대기업 계열사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삼성이 정말 상생 경영을 원한다면 이건희 회장이 직접 나서서 일일이 협력업체 납품 단가를 챙겨야 한다. 성과급이 중요한 임직원에게 협력업체 문제를 맡겨둬서는 동반 성장은 불가능하다.
이는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차·LG·SK 등 모든 대기업의 오너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대기업 총수가 직접 나서서 협력 업체를 점검하지 않으면 언젠가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월급 10억원을 받는 삼성 CEO가 납품 단가를 후려친다면 월급 200만원을 받는 협력업체 직원들이 가만히 두고 볼까? 재벌만 잘사는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한국 대기업 총수들은 한 해에 수백억원의 배당금을 받는다. 그러나 최신원 SKC 회장을 제외하고 10대 그룹 재벌 총수가 1억원 이상 개인 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대기업 총수부터 나누고 베풀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동반 성장을 외쳐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나 미국의 투자가 워런 버핏 같은 부자들이 천문학적인 개인 재산을 기부한 것이 바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힘이다. 김영수 기사기획 에디터 [출처] 조선일보 / 원문 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01/2011050101327.html 스티브 잡스가 제시한 '4단계 혁신이론'읽을거리/자기계발 2011. 5. 4. 17:58
[로스앤젤레스=이균성 특파원] 혁신의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브 잡스는 평소 이와 관련된 많은 말을 해왔다.
그의 어록을 분석해보면, 혁신은 기술과 세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변화’와 ‘다름’을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또 스티브 잡스의 혁신 이론은 4단계 과정을 그 핵심으로 삼은 듯하다. 그가 직접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어록을 분석해보면 그렇게 봐도 무방하다.
1. 모방하고 훔쳐라
첫 번째 과정은 주변의 것을 배우고 학습하는 '모방' 혹은 '훔침'의 단계다.
그는 1996년 미국 방송 PBS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위대한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사실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다. ‘뛰어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유명한 격언을 인용한 것이다.
그는 결국 혁신과 창의성은 어디 특별한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위를 열심히 탐구하고 획득하는 데서 나온다고 본다.
그는 2000년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창의성은 단순히 여러 가지 요소들을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며 “인간의 경험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수록 더욱 훌륭한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디자인이란 제품의 외관에서부터 포장 그리고 서비스라는 여러 단계를 통해 표현되는,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의 근본적인 영혼”이라고 말했다.
2. 가진 것을 모두 합쳐라
두 번째로 강조되는 게 '통섭(統攝)' 과정이다.
통섭은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책 'Consilience'를 국내 최재천 교수가 '통섭(統攝)'으로 번역한 뒤 노무현 정부 때 유행한 말인데 그 ‘통섭’의 실천자가 바로 잡스였던 것이다.
잡스는 지난 2일 아이패드2를 발표하면서 맺음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플의 DNA는 '기술만으로는 (좋은 제품을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플의 기술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주는) 인문학과 결합했다.” 기술은 사람을 위해 복무해야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고, 이게 제대로 되려면 인문학적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잡스는 이 점에서 폴라로이드를 만든 발명가이자 물리학자, 에드윈 H. 랜드(Edwin H.Land) 박사를 사숙(私淑)했다고 할 수 있다.
잡스는 1999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폴라로이드가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 서길 바란다.’는 랜드 박사의 말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그토록 강조한 것이다.
3. 다르게 생각해라
이미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을 ‘모방’하고 ‘훔침’으로써 세상에 대한 폭넓은 통섭을 바탕으로 변화의 길목에 미리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게 세 번째다.
잡스는 2007년 맥월드 행사 때 이런 자신의 노력을 캐나다의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영웅인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의 말을 인용해 대신했다. 그레츠키는 “나는 퍽(puck)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퍽이 갈 곳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간다.”라는 말로 잡스에게 영감을 줬다.
애플이 1984년 매킨토시를 만들어냄으로써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게 이를 테면 퍽이 갈 방향이었으며, 2001년에 내놓은 아이팟과 아이튠스, 2007년에 내놓은 아이폰, 2010년에 내놓은 아이패드 등과 같은 제품 또한 퍽이 갈 길목에 미리 내놓은 제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건 이들 제품 모두 이미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모방’과 ‘훔침’을 통해 세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 다시 변주됐다는 점이다.
4. 쉽게 단순화 해라
네 번 째 요소는 ‘단순화’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직감 혹은 직관(intuition)’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통섭이 난해해지면 일반인으로써는 별로 쓸 모가 없어진다.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하되 그것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해야 한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기술과 사람의 일은 복잡해지게 돼 있다. 이를 섞어서 통찰하면서도 직감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간에서 그 제품을 만들어내는 자의 사명이라는 게 스티브 잡스의 생각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선(禪)에 심취했다는 스티브 잡스는 1998년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어렵다. 생각을 깔끔하고 단순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상품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3분 안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엘리베이터 브리핑(Elevator briefing)’은 스티브 잡스에게는 단순한 마케팅 이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상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가의 철학으로 생각된다. [출처] 아이뉴스 24 원문 링크 :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555887&g_menu=020300 여러분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세요읽을거리/자기계발 2011. 5. 4. 17:54
Facebook’s Zuckerberg at BYU: Be passionate about what you’re doing
페이스북의 저커버그 (브리검 영 대학): 여러분이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세요
Facebook Founder and CEO Mark Zuckerberg joined U.S. Sen. Orrin Hatch and a crowd of 10,693 Friday at BYU’s Marriott Center for a special technology forum. Zuckerberg spoke about technology and education as Hatch asked a few of the roughly 450 questions previously submitted to BYU’s Facebook page.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가 스페셜 테크널러지 포럼을 위해 1만693명의 관중이 모인 브리검 영 대학의 메리어트센터에 오린 하치 미의원과 함께 참석했다. 저커버그는 BYU 페이스북을 통해 미리 제출된 450개의 질문 중 기술과 교육에 대해 하치 의원이 추린 내용에 대해 말했다.
Zuckerberg talked about founding Facebook, which now has more than 600 million users worldwide, his advice for budding entrepreneurs and his vision for the future of technology and social media. The following are highlights from his 50-minute question-and-answer session with Sen. Hatch.
저커버그는 지금은 세계에서 6억 이상의 사용자를 갖고 있는 페이스북을 설립, 예비 기업가에 대한 조언, 미래 기술과 소셜 미디어에 대한 그의 비전 등에 대해 말했다. 다음 내용은 하치 의원과의 50분간에 걸친 질의-응답에 대한 요약이다.
Opening
오프닝
“It’s an honor to be here with all of you guys today. I have to say, I am a little bit nervous. I have never had to speak to a stadium full of people before.”
“여러분과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약간 걱정이 앞선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예전에는 사람들로 가득찬 스타디움에서 말해본 적이 한번도 없거든요.”
On Facebook’s start
페이스북의 시작에 대해
“I built it when I was a sophomore at Harvard, but I did it not because I was trying to build a company. I just built it because I wanted the product to exist at Harvard. Within a couple of weeks, about two thirds of students at Harvard were using it. We started getting requests from MIT, BU and other Boston area schools. Then it kind of got out of control from there.”
“제가 하버드대학 2학년 때에 페이스북을 세웠는데요, 회사를 세우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저는 단지 하버드에 존재하는 상품을 만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몇주 만에 하버드대의 2/3 정도가 페이스북을 사용하고 있었죠. 저희는 MIT, 보스턴대학 및 다른 보스턴 지역 대학들로부터 요청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엔 뭐랄까 통제에서 벗어난 셈이 되었지요.”
“At the end of my sophomore year, I moved out to Silicon Valley. The idea at the time was still not to start as a company but just that there were all of these companies that come from Silicon Valley. I figured I’d have something to learn. My intention was to go back to Harvard at the end of the summer. You know, Harvard has this great program where you can take as much time off as you want, so I figured at the end of the summer, things were going pretty well, I’ll take a term off. Then things kept on going well, I’ll take another term off. And then a year, and a couple of years later, I’m like, all right, I guess I’m not going back to school.”
“”대학 2학년 말에, 저는 실리콘 벨리로 갔습니다. 그 때만 해도 회사로서 시작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이런 류의 회사가 모두 실리콘 벨리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간 거였어요. 저는 뭔가 배울 게 있겠지라고 예상했어요. 저는 여름이 끝나갈 때쯤 하버드로 다시 돌아갈 의도였어요. 아시잖아요, 하버드는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휴학을 할 수 있는 이런 대단한 학교 프로그램이라는 걸요, 그래서 여름이 끝나갈 때쯤 예상했죠, 일이 상당히 잘돼갔거든요, 한 학기 휴학을 내야겠다. 그 다음엔 일들이 계속 잘 돼가서, 한 한기를 또 휴학했죠. 1년 후에, 그리고 몇 년 후에, 저는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게 되겠구나 생각했죠.”
“It was lucky for me to go to Silicon Valley because it is an epicenter for technology. And I knew nothing about getting started, I knew nothing about setting up a company, I knew nothing about hiring people, about raising money. There are just a lot of resources in Silicon Valley that help out.”
“실리콘 벨리로 간 건 제게 행운이었어요, 왜냐면 실리콘 벨리는 기술의 핵심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뭘 어떻게 시작할지 전혀 몰랐고, 회사를 설립하는 것도 몰랐고, 사람을 고용하거나 자금을 공모할 방법도 몰랐어요. 실리콘 벨리에는 도움이 되는 자원이 정말 많아요.”
On Facebook’s success
페이스북의 성공에 대해서
“One thing that gets blown out of proportion in our culture is the focus on the single person or the couple of people that are running something. The success of Facebook is all about the team that we built. I think that’s true of any successful company.”
“우리 문화 중에 번영을 이끌어준 것 중 하나는 뭔가를 열심히 운영하는 개인 또는 사람들에 대한 집중입니다. 페이스북의 성공은 모두 우리가 설립한 팀 덕분입니다. 제 생각엔 모든 성공한 회사들의 진리인 것 같아요.”
“All of these problems at the end of the day are human problems. What people are really interested in is what’s going on with the people they care about. It’s all about giving people the tools and controls that they need to be comfortable sharing the information that they want. If you do that, you create a very valuable service. It’s as much psychology and sociology as it is technology.”
“결국에 모든 문제는 사람에 대한 문제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정말 흥미있어 하는 것은, 그들이 관심있는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도구와 통제권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굉장히 가치있는 서비스를 창조하는 겁니다. 공학만큼이나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이지요.”
Advice for budding entrepreneurs
예비 기업가를 위한 조언
(*budding은 ‘새로 싹이 트는’는 의미인데 기업가로서 시작하는 사람 뿐 아니라 기업가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까지 포괄적으로 쓰였다고 판단해서 ‘예비 기업가’라고 의역했습니다.)
“You have to really love and believe in what you’re doing. I think that’s the most important thing. If you start to build something … it’s hard and you encounter a lot of challenges. If you don’t completely love and believe in what you’re doing, it actually becomes the rational thing to stop doing it. Most people have something that they’re super passionate about, and I’d encourage you guys to find that thing.”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정말로 사랑하고 믿으셔야 합니다. 제 생각엔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여러분이 만약 뭔가를 세우기 시작했다면 그건 굉장히 어렵고 또 여러분은 많은 시련에 봉착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시는 일을 완전하게 사랑하고 또 믿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 일들을 그만두는 게 합리적일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짜로 열정적이게 하는 뭔가를 갖고 있지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찾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I think it’s important if you’re going to take on any big challenge, that you just love and really have faith in what you’re doing. That I think is the most important advice I would say, more than any specific technical thing about how to build a company.”
“저는 여러분들이 큰 난관에 맞닥뜨렸을 때에 그저 여러분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대해 진실된 신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회사를 세우는 데에 있어 어떠한 특정한 기술적인 문제들 보다도,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We look for people who are passionate about something. In a way, it almost doesn’t matter what you’re passionate about. What we really look for when we’re interviewing people is what they’ve shown an initiative to do on their own.”
“저희는 어떤 것에 대해서 열정적인 사람들을 찾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이 무엇에 열정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정말로 찾고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진취성입니다.”
On security and future innovations
보안과 향후 혁신에 대해서
“You [Sen. Hatch] were just talking about how you think a good policy of government is to get out of the way so good companies can build good things. We believe there will be much better services for all the people who use Facebook if millions of people around the world can develop those services. A good independent entrepreneur should always be able to do something better than a division of a company.”
“하치 의원께서는 정부의 좋은 정책이란 그들을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역주>실리콘 벨리의 회사들을 규제하지 않는 것이 기업활동을 장려하는 길이라는 내용입니다.) , 좋은 회사들이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저희는 만약 전세계 수 백만의 사람들이 그러한 서비스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한다면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훨씬 좋은 서비스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We think that our company understands the technology and social issues fairly well, but we want to enable entrepreneurs across the world…. There is a huge opportunity for disruption in any area that you’re passionate about. And we want to enable independent entrepreneurs to do those things. I think then we can build a much stronger ecosystem of apps.”
“저희는 페이스북이 기술과 사회적 이슈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전세계의 기업가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열정적인 분야가 무엇이건 그 분야의 혼란 속에 거대한 기회가 있다는 것을요. 또한 저희는 독립적인 기업가들이 그러한 것들을 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더 강력한 프로그램들의 생태계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One of the things that got people comfortable with having a page online is that we have extremely robust privacy controls…. We are really focused on safety, especially on children’s safety. We take a lot of extra precautions to make sure it is a safe environment for them. We really try to build a safe environment.”
“온라인에서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 중 하나는 저희가 굉장히 탄탄한 사생활 통제를 하고 있다는 건데요…. 저희는 보호, 특히 어린이의 보호에 굉장히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저희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한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부수적인 예방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출처] Global Marketer, 지금 이 순간 / 원문 링크 : http://nottoday.tistory.com/242 김제동 "20대 투표율 50% 등록금 반값 이룬다"읽을거리/사회 2011. 5. 4. 17:49
어젯밤 이화여대에서 진행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좌에 참석하였습니다. 20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취업’을 주제로 3가지 질문이 던져졌고, 스님의 열정적인 답변에 감화받은 300여명의 대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내었습니다. 마침 시사인 고재열 기자님과 연예인 김제동씨도 강의를 들으러 오셨길래 인증샷도 함께 찍는 행운을 누렸답니다.^^ 청춘들의 진심어린 고뇌와 법륜스님의 열정적이고 지혜로운 답변의 그 현장을 여러분들게 소개합니다.
▶질문자 : 27살의 직장인이면서 학생입니다. 이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에 들어갔는데 연봉도 작고 멀티플레이어를 요구해서 능력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해서 심리학을 공부하는데, 이것은 대학만 나오면 안되고 석사까지 해야합니다. 석사를 하자니 학비도 부담되고 서른 살이 넘는 나이가 부담이었습니다. 현실과 타협해서 이직을 생각했고, 가고 싶은 기업이 있는데 대기업입니다. 그런데 스펙이 발목을 잡습니다. 학벌도 별로고, 집에 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학연수를 가본 적도 없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나보다 스펙 높고 나이 어린 애들이 수두룩한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너무 가고 싶으니 해보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격지심과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긍정적으로 이직준비를 할 수 있을지요?
▶법륜스님 : 위로를 해드려야겠지만 위로한다고 인생이 변하지는 않는다. 따끔하게 말해 드리자면, 그런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이 말은 학력이 부족하고 재능이 부족한 걸 말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마음이 약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으로는 아무 일도 하기 어렵다. 죽을 때까지 늘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생을 마치게 된다. 가을바람에 떠도는 낙엽과 같다. 낙엽이 자기가 스스로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바람이 멈추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늘 휘날리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 남이 대학 가니까 나도 대학 가고, 남이 결혼하니까 나도 결혼하게 되고, 남이 차 사면 나도 사야하고... 이런 식으로 가을바람에 휘둘리는 낙엽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암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인생이 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인기가 많다든지, 돈이 많다든지 하는 사람들도 속을 들여다보면 거품 같은 존재들이다. 거기에 여러분이 눈이 멀어서 따라가기 바쁘다.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두 발로 땅을 딛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라.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두 발로 땅을 딛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지, 휘둘려서 정신없이 사는 것은 산다고 할 수 없다. 종노릇을 하지 말고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존재가 되지 말고, 세상을 굴리는 존재가 되라는 말이다.
세상에 굴림을 당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굴리는 자가 되라.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 굴림을 당한다. 남을 따라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러지 말고 내가 세상을 굴리는 자가 되어라. 남이 다 차를 사더라도 내게 필요가 없으면 안사는 지조가 있어야 한다. 가까운 거리도 차타고 가고, 운동 부족이라며 안가는 자전거를 헬스클럽에서 죽어라 탄다. 이것은 잘못이다. 세상이 어떻게 가든 자기 눈이 있어야 한다. 없어서 안 쓰는 것은 극빈이지만, 있는데도 안 쓰면 청빈이라 한다. 자발적인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20대 청춘이 벌써부터 그렇게 비굴해지면 어떻하냐.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어있다. 중소기업에 취직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작은 회사에서 온갖 것을 다 경험해보기 때문에 나중에 창업할 때 유리하다. 인생은 꼭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게 아니다. 20대인 여러분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도 좋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혼자 시작하기는 뭐하니까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좀 배워서 시도해볼 수도 있다.
억지로 공부하지 마라, 살아있는 공부를 해라.
영어 잘한다고 취직될 줄 아는가. 미국에서는 노숙자도 영어 잘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두 발로 딛고 자기 두 눈으로 보는 것이다. 지식은 자기 것이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유치원부터 억지로 공부한다. 논문 쓰기 힘들다고 하는데 굳이 힘들어 하면서 왜 하는가. 유학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 보내주면 얼마나 좋은가. 그게 왜 괴로울 일인가. 국가와 부모 돈 가지고 가서 공부하면서 왜 괴로운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인생을 그렇게 억지로 산다. 이런 공부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공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연애를 할 때 저 인간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아침 저녁으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왜 그런지, 이런 걸 연구하면 그것이 심리학이다.
밥벌이로 위대해진 사람은 없다. 자기가 좋아서 해라.
물결에 휩쓸려가는 나무토막처럼 인생을 살면 안 된다. 휩쓸려가는 것이 버티기보다 쉽지만 그것은 부평초 같은 인생이다. 심리학을 하려면 대학에서 기초를 배우고, 나머지는 창조하고, 오히려 동양의 직관을 배워라. 밥벌이로 하려 하지 마라. 밥벌이 삼아 돈을 얼마 받겠다는 생각으로 위대해진 사람은 없다. 유명한 화가 중에 밥벌이로 해서 위대해진 사람이 있는가. 자기가 좋아서 한 사람들이다. 미국 초기 유학생들은 다 접시 닦으며 공부했다. 여러분은 하는 공부는 억지 공부이다.
취직이 안된다면 이런 기회에 봉사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면 어떤가.
여러분은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취직이 안 된다. 첨단산업이라는 새로운 것으로 문제를 푼다지만, 이 수요를 다 맞출 수 없다. 물가는 오르고 살기 힘든데 국가는 성장한다고 하니 양극화는 심해진다. 재벌기업이 정부를 움직이기 때문에 시정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개인이 풀기 힘들긴 하지만 완화시키기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한 문제이다. 사회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역량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 속에서 개인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한없이 높은 자리 좋은 직장을 추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 못한다. 불만족스럽더라도 직장을 가지고 해야 한다. 부모에 의탁해서 원서만 몇 십군데 내는 것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모에게 의지해도 될 형편이면 오히려 이런 기회에 봉사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면 집에 빚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의 발상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우리가 만들자. 그것이 희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살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지 아무도 만들어줄 사람은 없다. 우리들 개개인의 긍정적 자세와 도전하는 자세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힘을 합쳐서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것이 희망이다. 민주화가 청년에게 희망이었듯이,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여러분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개인이 어디 취업하는 것만이 꿈과 희망이 아니다. 희망이 있으면 잠 못 자고 밥 못 먹어도 눈이 반짝한다. 도전의식이 있을 때 그렇다. 긍정적으로 보고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강의 시작 전 위축되어 있던 마음들이 조금씩 환하게 밝아지더니 끝날 때는 활기찬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갈수록 오르고, 취업도 안되고, 취업을 하더라도 각종 스트레스로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 청춘입니다. 하지만 스님과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으며 무거웠던 마음은 조금씩 밝아져만 갑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좋은 분위기에서 갑자기 깜짝 등장하는 인물이 있어 청중들을 모두 놀라게 했답니다. 바로 앞자리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들으셨다는 김제동씨입니다. 김제동씨의 강의 소감도 열렬한 환호를 받았답니다. 김제동씨의 소감을 끝으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현장 이야기를 임팩트 있게 마칠까 합니다.^^
▶김제동 : 여러분들의 질문 속에 제 모습이 다 있고 충분히 공감했다. 지금 직장도 있지만 더 좋은 직장을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렇다 공감되었다. 지금 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있지만 더 좋은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다는 끊임없는 불안이 있다. 방송국에 들어올 때 뛸 듯이 기뻤지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어떻게 난도질될까에 신경 써서 실제로 내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늘 그들이 사는 세상에 내가 살아서 그랬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던 순간이 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뿐더러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무대에 올라서면 늘 떨리지만 어느 순간 떨림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카메라 빨간불을 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보는 토크 콘서트를 하면서 자리를 찾았다. 녹화된 비디오를 보면서 소름이 돋는다.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했을까. 남을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가능했다.
20대 투표율 50%이면 등록금 50% 이뤄진다.
예전에는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는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못 해 미안하다. 더 이상 정치 놀음에 굴림 당하지 말고 20대 투표율 50% 되면 등록금 50% 깎인다. 투표율 100%가 되면 여러분 전액 무료로 대학 다닐 수 있다. 이런 말씀 드리는 이유는 제 이기심 때문이다. 제 아이는 싼 값에 교육받기 위해서다. 여러분 시대에는 더 이상 아버지가 장관이 아니라서 특채를 못시키는 것은 하지 말자. 그들이 만든 나라에서 살지 마시고, 그들이 만든 대학에서 공부하지 마시고, 우리가 만든 대학에서, 우리가 만든 나라에서 살아봅시다. 여러분을 지지하는 저같은 사람이 있으니, 여러분이 만들고 싶은 나라 만들 때 앞장서지 못하더라도 함께 서 있겠다. (박수)
[출처] 희망플래너 / 원문 링크 : http://hopeplanner.tistory.com/112 상생과 소통의 인간교육을 시작하자읽을거리/인문 2011. 5. 4. 17:38카이스트에서 일어난 학생들과 교수의 연속 자살로 대학의 무한경쟁과 기업화 분위기에 제동이 걸렸다. 명문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지방대는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무한경쟁에 매몰되어왔다. 그러나 이는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세계적인 신경생물학자인 요아힘 바우어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칙>이란 책에서 인간은 원래 경쟁보다는 상호협력을 통한 관심과 공감의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공생’을 통해 단세포 미생물에서 다세포로, 또 고등 동식물로 진화해온 생태계의 특성에 바탕을 둔 학설로, 맹자가 자연에 내재하는 온화한 기운을 보고 주창한 성선설과 통한다. 바우어는 경쟁력의 원천인 동기부여 체계를 유지해주는 체내 분비물질인 도파민이나 옥시토신은 사람들이 서로 인정·존중·관심·애정을 주고받을 때 많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자본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공감과 신뢰를 박탈해버려 소외시킨다. 동기부여 물질 대신 아드레날린이나 노르아드레날린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다량 분비되면서 마음과 몸이 모두 병들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바우어는 다윈을 근시안적으로 잘못 해석한 우생학자들과 생물계의 이기적 유전자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인류의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고 반박했다. 교육은 영리를 위해 경쟁력을 추구하는 기업과는 달리 양심과 사회적 책임을 갖춘 바른 사람을 만드는 목표를 우선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남과 경쟁하기보다는 우선 자기의 나태·무능과 경쟁하고 주어진 책무에 충실하며 이웃과 상생을 통해 조화로운 삶을 이루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 가치관인 ‘홍익인간의 대동사회’를 실현하는 길이다. 공자는 이러한 일을 선도하는 사람을 군자라 일컬었고, 태이불교(泰而不驕), 즉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다고 표현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이웃을 존중해 서로 비교하지 않으므로 교만하거나 비굴할 필요 없이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지 <포천>이 매년 발표하는 ‘가장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 중 2011년 1·2·3위를 차지한 에스에이에스(SAS),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 웨그먼스푸드마켓의 몇가지 주요 공통점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사원들을 단기경쟁에 매몰시키기보다는 지적으로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 자신의 일을 즐기는 직원들이 많고 임시직이 없다. 또한 직원들은 겸손하고 친절하며 남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다. 더불어 소비자로 하여금 제품 개발과 개선에 참여하도록 허용한다. 결론적으로 지나친 경쟁보다는 상호협력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고객 봉사와 사랑의 정신이 살아있는 기업들이다. 학생들을 이런 기업이 원하는 인재로 키우려면 상생의 우리 전통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적은 경쟁에서 1등 하는 한명의 인간과 다수의 패자를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협력적인 다수의 선한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 스승은 학생들을 영어·수학만 잘하는 기능인으로 키우기 위해 줄 세울 것이 아니라 각자 다양한 재주를 스스로 발견하고 관심과 열정으로 이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보다는 다양한 주제를 던져주고 발표와 토론을 통해 서로 의견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이 자신의 뜻을 담은 글을 많이 쓰도록 유도하고 이를 발표하고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경희대가 학부생 교양교육 전담기구인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연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철학과 역사, 문학, 물리, 예술 등의 인문학 교육을 확대해 세상을 바라보는 큰 눈을 키워줘야 통섭교육이 가능해진다. 이기영 초록교육연대 상임대표/호서대 교수 [출처] 한겨레 / 원문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5991.html 거품경제의 유혹읽을거리/경제/경영 2011. 5. 4. 17:37“내년 총선·대선 때 포퓰리즘에 빠져 재정안정에 반하는 일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 4월23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며 한 말이다. 맞는 말이다. 재정을 수반하는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면 국가재정은 거덜나게 돼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가리키는 방향이
묘하다. “선심성 복지를 경계하고, 재정안정을 기해야 한다.” ‘선심성’이란 수식어를 달고 칼끝은 ‘복지’를 향한다.
내년 선거를 너무 의식해서일까. 복지 담론을 포퓰리즘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의도는 그렇다치고, 재정안정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재정안정을 해치는 정책은 정작 자신이 앞장서지 않았는가 말이다. 엊그제 ‘친수구역 특별법’이 본격 시행됐다. 자연친화로 포장한 겉과 달리 속은 4대강변 새도시 개발을 보증하는, 일종의 토건법이다. 개발 가능 면적은 전체 국토의 4분의 1에 이른다. 본류에 22조원, 지류에 20조원, 수질 관리에 또 매년 수천억원…. 4대강 사업비 증가는 가히 기하급수적이다. 수변 신도시 조성에 들어갈 돈까지 합치면 50조원은 훌쩍 넘길 것이란 추산이 나온다. 나라 곳간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정부 발표로는 지난해 우리나라 국가채무가 370조원이라지만, 정부가 떠안을 수밖에 없는 공기업 부채, 보증채무 등을 합치면 사실상의 국가부채는 1400조원을 넘어선다. 집집마다 가계대출로 허덕이는데 공공부문, 정부 할 것 없이 빚더미가 쌓이니 숨이 막힌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나? 가장 큰 원인은 거품경제에 기반한 재정 운용에 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말기로 갈수록 경기부양 유혹에 더 빠질 것이다. 역대 정권 때도 그랬다. 정부 관료들은 “버블 붕괴 위험을 누가 알았겠는가”라고 변명을 늘어놓지만, 당시에도 경고 메시지는 적지 않았다.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어제 정부가 건설경기 부양책을 또 한보따리 풀어놨다. 부동산 부양책이 나온 지 40일 만이다.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이 지난주 건설사 사장들을 만났을 때 나온 건의사항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이다. 당장 급한 불은 끄겠지만, 이런 임기응변식 단기 처방으로는 부작용만 더 키울 뿐이다. 부실 건설사 정리와 구조 개혁이 늦춰지면 결국 금융권 동반부실로 이어지고 국민경제도 멍든다. 막대한 재정을 경기부양 대책에 투입하고도 장기 침체로 치달았던 일본의 뒤를 따를 것인가. 안 그래도 지금 공적자금을 기다리는 곳이 줄을 서 있다. 부실 덩어리가 된 저축은행 뒤처리를 해야 하고, 취득세 인하로 발생하는 지방세수 부족분 2조1000억원도 국민 혈세로 메워야 한다. 이래저래 국가재정은 속으로 곪는다. 약탈적 대출관행에 이끌려 가계부채 1000조원 문턱에 선 국민경제도 골병이 들긴 마찬가지다. 올해 국가 재정전략회의에서는 ‘재정 건전성’이 강조됐다. 그럼에도 재정 악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대규모 토건사업과
부자 감세 기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재정 건전성을 높이려면 방만한 씀씀이를 줄이고, 세입을 확충하는 건 기본이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재정
건전성을 꾀한다면, 경제협력력개발기구(OECD) 평균에도 못 미치는 복지 지출 운운하기 전에 당장 부자 감세를 거두고
토건 부양책을 멈춰야 한다. 말로만 건전재정을 외치다가는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경기부양을 위해 대규모 토건사업에 매달리다 호되게 당한 일본과,
재정 투입에 따른 후유증으로 휘청거리는 그리스·포르투갈 등 피그스(PIGS) 국가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재정 악화는 국가재앙을 부른다. 개천에서 용이 못 나는 한국읽을거리/인문 2011. 5. 4. 17:35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새 국정기조로 삼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정치적 표어조차 국민의 뇌리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이 대통령의 공정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
또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라고 하였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공정성 전망은 여전히 밝지 않다. 그 근거는 출발과 과정이 공평하지 못한 교육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유아교육의 기회가 공평하지 않다. 최근에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유아교육 취학률이 2010년 39.9%에 불과했다.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4~5살 정규 유아교육 취학률 96.3%와 대조된다. 유아교육 진학률이 낮은 것은 물론 경제적인 문제이다. 2010년 말 유니세프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소득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훨씬 크고 회원국 중 3위라고 한다. 소득격차 때문에 생기는 낮은 유아교육 진학률을 정부 정책이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중 미취학 아동(0~6살)에 대한 정부의 공적 지원율이 0.17%로 회원국 평균인 0.61%를 한참 밑돈다. 유아교육의 효과는 평생 지속되며, 어느 학교급보다도 크다고 한다. 호주에서 약 1만명의 아이를 장기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정규 유아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이 유아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들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특히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유아교육을 받아 모든 학습의 기초가 되는 한글을 대략 읽고 쓰는 학생에 비하여 유아교육 없이 입학한 학생들은 처지기 시작하고 열등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학교의 교육과정도 공평하지 못하다. 교육에는 ‘피그말리온 효과’ 또는 ‘기대자의 효과’가 작용한다. 가령 교사가 어떤 학생에게 지능지수가 높다든가 공부를 잘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면, 다른 학생에 비하여 그 학생에게 관심과 호의를 갖고 조언·지도를 더 잘하게 되어 그 학생의 성적이 좋아진다는 교육심리학 이론이다. 게다가 학교에 들어가면 신상명세서를 작성하는데, 보호자의 학력과 직장을 쓰게 되어 있다. 선진국에서는 그런 정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정보는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선입감이나 편견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교육기회의 격차는 사교육으로 인해 더 심화된다. 초·중·고 전체 학생들의 사교육 참가율이 2009년에 서울이 80%인 데 비해 읍면지역은 67%밖에 되지 않고, 사교육비 지출액은 서울이 읍면의 두 배가 넘는다. 더욱이 자녀 1인당 사교육비 지출액은 월소득 200만원 미만 저소득층 가정보다 월소득 500만원 이상 고소득 가정에서 약 5배나 높다. 이렇게 교육의 출발과 과정이 공평하지 못한 것은 교육 결과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가난하거나 유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은 교사의 관심에서 소외되고 공부에 취미를 잃게 되어 수업시간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수업 태도의 차이는 수능성적과 대학진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2004~2008년간 평균 수능성적이 월소득 200만원 이하 저소득층 학생은 257.6점인 데 비해 500만원 이상 고소득층 집단은 291.1점으로 나타났다. 4년제 대학 진학률도 전자가 43.1%인 데 비해 후자는 77.8%였다. 한국의 임금체계는 교육의 차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과거 10년간 고졸자나 전문대 졸업자의 임금은 4년제 대학 졸업자 임금의 66%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학력별로 임금격차가 장기간 변동하지 않는 것은 역량보다 학력에 의해 임금이 정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교육의 차이는 소득의 차이로,
소득의 차이는 교육의 차이로 연결되어, 가난은 대를 물리게 되고 사회계층간의 불공정은 더 심화되기 마련이다. 교육의 출발과 과정을 공정하게 하고
학력간 임금 격차를 개선하지 않는 한 개천에서 용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와 다름없다. 영리병원을 경계한다읽을거리/사회 2011. 5. 4. 17:33
많은 이에게 선망의 대상인 미국이 우리보다 못한 분야는 바로 의료보험이다. 수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의료보험 없이 살고 있고, 그러다보니 손가락 곪은 걸 돈을 들여 치료하느니 그냥 잘라 버리는 길을 선택하는 게 그네들의 실상이란다. 전체 병원의 93%가 민간병원인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이 땅의 모든 병원은 죄다 국민건강보험과만 계약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당연지정제’ 덕분이다.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면, 이 건강보험이 굉장히 좋은 보험이라는 것.
내가 의료보험료로 2만원을 낸다고 해보자. 그러면 건강보험법에 따라 나를 고용한 직장에서도 똑같이 2만원을 부담해 주고, 정부는 이 둘을 합친 4만원의 20%, 그러니까 8000원을 내준다. 자기가 낸 보험료의 2.4배가 보험료로 적립되는 셈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걷은 보험료 중 국민들의 의료비로 지출하는 비율, 즉 급여율이 100%가 넘는다. 직원들 월급도 주고 이익도 내야 하는 민간보험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수치로, 2006년만 봐도 급여율이 무려 114%에 달한다. 이러니 건강보험이 적자가 날 수밖에. 보험료를 올려도 적자가 계속되는 이유는 돈이 생기면 생길수록 또 다른 서비스를 해주기 때문인데, 2010년 보험료가 4.9% 오른 대신 뇌혈관질환 등 9가지 질환에 대한 보험적용이 확대된 게 그 한 예다. 다른 세금과 달리 건강보험료 인상엔 너그러워도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 건강보험이 부자들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제도라는 것. 건강보험료의 책정이 소득에 따라 누진적으로 결정되는 탓에 일반 서민들은 자기가 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받는 반면 부자들은 비싼 보험료를 내면서도 별반 대접을 못 받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황금알을 낳는 의료시장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민간보험사들도 건강보험이 밉고, 의사들도 건강보험이 정한 낮은 수가가 탐탁지 않다. 사정이 이러니 가진 자들을 유난히 배려하는 현 정권으로선 건강보험의 틀을 무너뜨려야 할 동기가 생기게 마련이다.
“정부는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병원을 시범 도입한 후 전국 확대 여부를 논의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4월28일자, 경향신문)
영리병원은 말 그대로 영리를 위한 병원이다. 이게 생기고 나면 수익을 낼 수 있는 비보험진료에 집중할 테고, 궁극적으로는 수가가 싼 건강보험 대신 돈을 많이 주는 민간보험사와 계약하려 할 것이다. 건강보험의 핵심 틀인 당연지정제가 깨진다는 얘기다. 한 번 물꼬가 트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지게 마련이어서, 나중엔 삼성병원이나 아산병원에 가려면 지금보다 10배 이상의 돈을 줘야 가능할 것이다. 이런 비난을 의식한 보건복지부는 “영리병원 도입의 전제조건은 당연지정제 유지”라고 둘러대지만, 그게 말이 안된다는 건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터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당연지정제는 저절로 폐지될 수밖에 없다.”
경만호 대한의사협회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얘기다. 물론 그는 당연지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쪽이지만, 그의 발언에는 복지부가 숨기려던 진실이 담겨 있다.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정형근은 이렇게 말했다. “영리병원을 허용한다면 건강보험은 뿌리째 흔들릴 것이 뻔하다.” 그러면서 그는 영리병원에 대한 반대의견을 거듭 천명했는데, 살아생전 내가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정형근의 의견에 동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안기부의 저승사자였던 정형근도 반대하는 영리병원이니, 얼마나 무서운 병원이겠는가? 영리병원을 경계해야 할 이유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출처] 경향신문 /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국민연금이 당신을 지켜주려면읽을거리/경제/경영 2011. 5. 4. 17:30
직장 상사에게 호되게 당했다. 당장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다. 책상 서랍
속의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는 순간, 문득 노후가 불안하다. 여기서 계속 버티면, 내게는 무엇이 남게 될까?
그리고 국민연금관리공단 웹사이트에 들어가 본다. 현재 소득을 계속 유지하면서 정년까지만 버티면 만 65살 이후 최소 생활비는 나온단다. 또 한번 참는다. 서성대다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직장인의 흔한 일상이다. 국민연금은 이렇게 우리 국민 곁으로 왔다. ‘노후 생활비’라는 간판을 걸고. 그런데 그 직장 상사는 왜 내게 모진 말을 던졌을까? 틀림없이 실적, 그것도 이번 분기나 이번달 실적 때문이다. 분명 사장님에게 크게 당하고 왔을 것이다. 사장님은 납품 대기업의 젊은 대리에게 쓴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 대리 위에는 다시 부장과 임원과, 실적 나쁘면 바로 쫓겨날 형편인 사장이 있다. 모두가 쫓기는 게임, 그 마지막에는 누가 있을까? 그 끝에는 ‘어떻게든 비용을 더 줄이고 매출을 늘려라’라고 호통치는 ‘주주’가 있다. 국민연금은 그 ‘주주’의 자리에 있다. 그것도 거대한 주주다. 삼성전자의 5%, 현대자동차의 5.95%, 포스코의 5.43%를 보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투자자로서 당장 배당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기업이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내 미래 생활비를 맡아 관리하는 기관이 동시에 나의 현재를 압박할 수 있는 모양새다. 국민연금이 단기 수익률을 높이는 데만 급급하면, 정작 우리 삶의 안정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좀더 나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집속탄’은 분쟁이 끝난 뒤에도 그 지역에 수많은 불발탄으로 남아, 민간인을 살상하고 장애인을 양산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국제사회의 금지 요구가 거세다. 한국에서는 한화와 풍산이 집속탄을 생산한다는 지목을 받고 있다. 둘 다 상장기업이다. 국민연금은 이 두 기업의 지분을 각각 5% 이상 보유하고 있다. 당신의 노후 자금 일부는, 당신의 가치관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명살상용 폭탄 제조기업에 투자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다. 연금은 담배회사에도 공해산업에도 투자되어 있다. 우리는 미래 생활비를 마련한다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수명을 단축하는 산업을 육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