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동물원, 애플 생태계
읽을거리/경제/경영 2011. 5. 12. 15:10
이건희 삼성 회장이 '출근 경영'에 나선 것은 결국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그가 20년 은둔 경영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야 할 만큼 삼성전자가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다. 당장 주력 제품의 성장 가도(街道)에 제동이 걸렸다. LCD·TV·반도체 등 현금을 쓸어담던 전공 분야에서 삼성의 기세는 작년 같지 않다.
경쟁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협공에 나섰다. 인텔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었고, 일본 메이커들은 25나노급 개발로 삼성 추월 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무서운 것이 애플의 움직임이다. '디지털의 제왕(帝王)' 애플은 특허 소송으로 삼성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다. 애플이 삼성과의 반도체 공급 파트너십을 깰 것이란 관측도 무성하다. 아마 애플은 이리저리 삼성을 찔러보다가 약하다 싶으면 본격 공세에 나설 것이다.
이건희 회장도 작금의 상황을 잘 안다. 요즘 그는 입만 열면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삼성이 애플의 벽을 넘어서지 않고는 진정한 글로벌 톱 기업이 될 수 없다. 기술·특허력이나 재무능력 등에서 삼성이 꿀릴 것은 없다.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창의적 리더십을 자랑한다면, 삼성엔 빠른 의사결정 시스템과 과감한 선제투자 능력이 있다. 쉽진 않겠지만 삼성으로선 해볼 만한 게임이다.
그러나 문제는 삼성의 '홈그라운드' 사정이다. 지금 국내의 여론 흐름은 어느 때보다 삼성에 불리해졌다. 대기업이 잘돼야 혜택이 중소기업·서민경제로 흘러간다는 '폭포수론(論)'이 빗나간 결과다. 대기업 호황 속에서도 중소·하도급업체는 고전하는 현실을 보면서 국민은 삼성으로 상징되는 대기업 문제를 다시 보게 됐다.
삼성은 MB 정부가 펼친 친(親)기업 기조의 최대 수혜자다. 삼성의 천문학적 수익은 고환율 정책에 힘입은 측면이 크고, 이렇게 쌓은 현금으로 계열사를 3년 새 32%나 늘렸다. 숙원이던 금융·산업 분리규제가 폐지된 덕에 지배구조도 탄탄하게 굳혔다.
우리 사회가 이런 정책을 용인한 것은 대기업이 잘돼야 국가경제가 좋아진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국민들은 이건희 회장의 조기 사면과 경영 복귀까지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폭포수론'이 깨진 순간,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는 더이상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삼성엔 '삼성 동물원' 비유까지 쏟아지고 있다. 벤처기업인 출신 안철수 교수는 이 땅의 중소업체들이 대기업의 예속적 하도급구조에 편입될 것을 강요받는다고 주장한다. '동물원'에 들어간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죽지 않을 만큼 던져주는 먹이로 연명하다 끝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엔 과장이 있고 틀린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소·벤처업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삼성 동물원' 담론에 공감하는 여론이 많아졌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 '쥐어짜는 갑(甲)'의 이미지가 씌워지는 것 자체가 삼성의 약점이다.
삼성을 죽이려 드는 애플의 전략은 대조적이다. 애플은 중소개발자들이 먹고 살아갈 환경을 만들어 주는 '생태계'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다. 동물원이 갑과 을의 일방적 관계라면, 생태계는 공생하는 파트너십 시스템이다.
동물원과 생태계의 차이는 크다. 애플 생태계가 끝없이 진화하는 것은 수많은 참여 기업들의 자발적 혁신 덕이기도 하다. 삼성이 이런 창의적인 생태계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꼴이다.
삼성으로선 억울하게 비난받는 측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모국(母國)에서 축복과 지지를 얻지 못하는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