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사회'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1.05.15 식량위기, 내 탓은 없는 걸까
  2. 2011.05.15 굶는 아들에게 돈 대신 편지 쓴 아내 현숙한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
  3. 2011.05.12 전자책은 종이책의 적이 아니다
  4. 2011.05.12 ‘정규직 세습’ 묵인 않는 노조원들
  5. 2011.05.10 공동체 되살리는 SNS
  6. 2011.05.10 ‘원전 폐기’ 강력히 요구한다
  7. 2011.05.09 ‘실패할 권리’ 없는 사회
  8. 2011.05.09 ‘쥐그림’으로 대변되는 언론·표현의 자유
  9. 2011.05.09 나는 검사다
  10. 2011.05.09 시민의 새로운 각성 보여주는 ‘통신생협’
  11. 2011.05.04 김제동 "20대 투표율 50% 등록금 반값 이룬다"
  12. 2011.05.04 영리병원을 경계한다

식량위기, 내 탓은 없는 걸까

읽을거리/사회 2011. 5. 15. 15:33
얼추 오십을 넘긴 시골 출신이라면 대부분 경험했을 거다. 배고픔. 너나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그게 불과 몇십년 전이다. 흐른 세월은 과거를 부정한다. 배고픔의 기억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일 뿐이다. 이젠 밥풀 흘렸다고 욕먹지 않는다. 오히려 떨어진 밥풀을 주워 먹으면 혼난다. 풍요와 배부름이 당연한 세상이다. 어느덧 빈곤과 배고픔은 내놓기 쑥스러운 주제가 되어버렸다. 남의 일일 뿐이다.

그래도 좋은 걸까. 여전히 지구촌은 배고프다. 한국도 배고픔을 완전히 떨쳐버린 건 아니다. 한반도로 범위를 넓히면 처참하기까지 하다.

올해 초 식량 문제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그땐 모두가 식량위기를 말했다. 참 떠들썩했다. 하나 그도 잠시, 세상은 이내 조용해졌다. 그새 국제 곡물가격은 슬금슬금 올라 우리 식탁 물가를 위협하고 있다. 라면에서 과자까지 오르지 않은 게 없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릇된 환율정책, 시기를 놓친 금리정책, 기업들의 이기적 이윤추구, 미국의 폭력적 양적완화 정책 등을 들먹이며 비난에 열을 올린다. 모두 일리 있다. 그런데 전부 남 탓이다. 내 탓, 우리 탓은 없다.

식사나 술자리 직후, 식탁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대개 남겨진 음식물로 질펀하기 마련이다. 왕왕 먹은 양보다 남겨진 양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이렇게 남겨진 음식물은 쓰레기일 뿐이다. 과잉 소비다.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에겐 쓰레기에 불과한 이 음식물을 얻기 위해 오늘도 지구촌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오늘도 10억명의 사람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걸. 그런데도 우린 오늘도 넘치게 차려 남기고 버린다. 이게 지구촌 식량위기의 한 원인이다. 우리도 원인제공자다.

물론 과잉소비는 식량·식탁물가 위기의 종범에 불과하다. 주범은 따로 있다. 바로 곡물의 엉뚱한 전용이다. 지구촌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상당량이 육류와 연료 생산에 전용된다. 미국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3분의 1이 에탄올 생산에 쓰인다.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사료로 쓰이는 곡물도 만만치 않다. 한 단위의 고기를 얻기 위해선 그 몇 배의 곡물이 투입되어야 한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고기는 농축된 곡물 덩어리이다.

이러니 식량위기가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잉소비와 곡물의 전용이 식량위기를 상시화하고 있다. 이게 식량위기의 본질이다. 설상가상 지구촌의후변화 양태도 심상치 않다. 토양은 점점 오염되고 있고 대수층은 나날이 고갈되고 있다. 게다가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2060년이 되면 지구촌 인구가 100억명을 돌파할 거란 전망이다. 무서운 일이다.

지구촌 전체가 해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 전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즉시 시작해야 한다. 곡물의 에탄올 전용을 개인이 막아내기는 힘들다. 하나 먹거리 소비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적당히 먹고 적게 버리면 된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게 세상을 바꾸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건 물가 상승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자발적 소비 억제야말로 힘없는 소비자가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터무니없이 비싼 과자와 라면은 아예 사 먹지 않으면 된다. 그래야 자본의 횡포도 줄어들 것이다.

한 번 두툼해진 뱃살은 빼기 힘들다. 그래도 빼야 한다.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든다. 이게 무슨 낭비란 말인가. 애초 넘치게 먹지 않으면 될 일이다. 절집의 승려가 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때론 흐드러지게 먹고 마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가끔이어도 좋을 일이다. 매일이 마냥 풍요로운 축제일 수는 없다. 약간의 허기에서 오는 절제의 행복이 포만감에서 오는 그것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이게 나 자신과 지구를 사랑하는 길이다.

윤석천 경제평론가

[출처] 한겨레 / 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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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는 아들에게 돈 대신 편지 쓴 아내 현숙한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

읽을거리/사회 2011. 5. 15. 15:29

삶과 믿음

끔찍했다. 아들은 오랫동안 먹을 게 없어 저희 엄마가 아침 굶지 말라고 보내 준 미숫가루를 먹고 끼니를 때웠단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맥도날드를 찾아 1달러짜리 정크푸드를 사 먹고 버텼다고 했다. 울먹이며 걸려온 아들의 전화. 아내는 서럽게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 외출을 못할 지경이었다.

업보(?)였다. 우리 가정의 원칙이 하나 있다. 대학 졸업까지는 전폭적으로 도와준다. 하지만 그 후엔 독립해야 한다. 아들도 알았다. 아빠·엄마는 할 도리를 다했다는 것을. 제때 졸업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제 탓이었다. 누구도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그날로 독립을 선언했다. 이제는 내가 내 길을 가겠노라고. 그렇게 해서 공부를 접었다. 회사 문을 두드렸다.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녀석이 찾아갈 변변한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 일종의 다단계 판매회사였다. 주방용 칼을 파는 곳이었다. 수습을 거쳐 드디어 대사업가의 길로 나섰다. 그렇게 달 반을 넘게 발이 부르터져라 돌아다녀 겨우 칼 두 자루를 팔았다. 주머니는 비었다. 막막했다. 겨우 자존심을 접고 엄마에게 털어놓은 아들의 고백.

이 지경이라면 남편 모르게라도 돈을 보내 아들부터 살려 놓고 보는 게 옳다. 그런데 아내는 돈 대신 편지를 썼다. 감정이 격해 아들과 못 다 나눈 이야기들이었다.

밤늦게 집에 들어서던 나는 미처 끄지 못한 컴퓨터에 남겨진 아내의 e-메일을 훔쳐보게 됐다. 거기 이런 글이 있었다.

‘준아, 엄마가 너를 돕고 싶지만 돕지 못해 미안해. 너나 우리 가족 모두는 아빠가 정한 규칙을 따라가야만 해’.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성경은 말한다. ‘누가 현숙한 아내를 얻겠느냐. 그녀는 진주보다 더 소중하다. 그런 여자의 남편은 아내를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일평생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남편을 해치지 않는다’. (잠언 31장 10-12절)

며칠 후면 부부의 날이다. 그때 그 형용하지 못할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해 본다.
가-가장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일러 ‘행복’이라 합니다.
나-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것은 ‘소망’입니다.
다-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라-라일락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에 목마름은 ‘그리움’ 때문입니다.
마-마음속 깊이 당신을 사모하다 ‘시인’이 되었습니다.
바-바라볼수록 당신은 내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사랑한다는 수천 마디 말보다 더 기다려지는 것은 당신의 그윽한 ‘눈길’입니다.
아-아무런 대답이 없어도 여전히 기다릴 수 있음이 ‘믿음’입니다.
자-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도 아깝지 않은 것은 당신의 ‘미소’가 있어서입니다.
차-차가운 겨울이 와도 두렵지 않은 것은 당신의 ‘숨결’이 느껴져서입니다.
카-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목청껏 소리치고 싶은 것은 당신이 나의 ‘꿈’이 되어서입니다.
타-타인으로가 아닌 함께 걷고 싶은 것은 ‘하나’의 의미를 깨우쳐서입니다.
파-파아란 하늘과 구름 위에 햇살처럼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은 그대가 나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서입니다.
하-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이래서 부부 사랑의 메아리는 존경과 애정이라 한 것일까.

송길원 /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

[출처] 중앙일보 / 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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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은 종이책의 적이 아니다

읽을거리/사회 2011. 5. 12. 15:15
얼마 전 한 대형 서점에서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어린이가 태블릿PC에 푹 빠져 있는 걸 봤다. 사방에 널린 종이책을 앞에 두고 전자책을 선택한 어린이를 보면서 최근 출판업계 화두인 전자책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아직까지 출판업계에는 전자책이 종이책의 미래를 막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의 시선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디지털 출판과 아날로그 출판은 기본적인 성격이 다르다. 종이책은 책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책 자체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밑줄을 긋거나 좋은 페이지를 접고 메모를 하는 등 그 모든 행위가 책을 읽는 과정이다. 반면 전자책은 단순히 텍스트가 스마트폰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멀티미디어로 표현할 수 있는 콘텐트가 스마트 기기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즉 전자책은 종이책 시장을 잠식하는 것이 아닌 멀티미디어와 결합된 새로운 시장을 연 것이다.

이는 전자책의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동 학습만화를 필두로 추리소설이나 로맨스 소설 및 어학·자기계발 중심의 실용서가 매출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가볍게 잠깐씩 읽을 수 있는 책이나, 시각·청각·촉각 같은 오감을 통한 학습이 가능한 아동용 책의 특성에 잘 맞는다는 얘기다. 또 전자책 독자들의 피드백은 즉각적이다. 온라인 카페를 통한 정보공유, 개선점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제시 등 종이책을 내놓았을 때는 경험하지 못한 생기 넘치는 반응들이 쏟아진다.

스마트 시대로의 변화 속에서 전자책은 독자들과 만나는 새로운 콘텐트 창구다. 따라서 전자책을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력을 키우는 또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탄탄한 콘텐트 개발에 힘을 쏟아야 한다. 전자책의 활성화로 책 읽는 환경이 다양해지고 이를 통해 독서 자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면 출판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전자책은 전자책대로, 종이책은 종이책대로 각자의 장점과 특징을 살려 그 파이를 키워 나간다면 서로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책은 디지털이 채울 수 없는 공간을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메우고, 전자책은 편리하고 다양한 볼거리로 새로운 경험을 전함으로써 우리 출판의 미래를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김영진 미래엔 대표

[출처] 중앙일보 / 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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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세습’ 묵인 않는 노조원들

읽을거리/사회 2011. 5. 12. 15:07
고된 일과를 마친 뒤 술을 몇 잔 걸쳐 불콰해진 얼굴로 참석한 사람들이 거의 절반은 돼 보이는 자리였다. 50대 후반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강의가 끝나고 이어지는 질문 내용들이 좀 이상했다. 사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노동문제에 대해 받아보지 않은 질문이 거의 없는 편이어서 대상에 따라 질문 내용을 미리 짐작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강의 내용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대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한다.

많은 사업장서 자녀 특례 채용

며칠 전 강의가 끝나고 받은 대학생 질문지 내용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옮기면 다음과 같다. “노조가 결성돼서 자신들의 요구를 하고 기업이나 정부가 들어준다면, 노조는 더욱더 무엇을 바랄 텐데 안 들어주면 또 파업을 할 것이고 그러면 생산성이 떨어져 나라의 소득이 줄어들 텐데 이건 처음 노조의 뜻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5월을 맞아 광주를 찾아온 ‘소수 불순’ 대학생들 중에서 나온 질문이니 보통 대학생들 대부분의 생각이 그러할 것이라고 짐작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초·중등학교 제도권 교육에서 위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이 일찍이 마련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제도권 교육과 언론이 위와 같은 의문을 오히려 학생들 머리 속에 심어준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평생 노동자로 살아온 50대의 노동자들이 질문을 하면서 항의하듯 거칠게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강사를 노동부 관리쯤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차 싶었다. 오래 전, 그런 노동자들을 자주 만나던 때가 있었다. 노동부와 노동조합조차 구별하지 못하고 ‘노동’이란 단어가 붙은 곳은 모두 한 통속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활동가들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거다.

이렇듯 노동문제에 대해 좀더 세밀한 시선이 아쉬울 때가 많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자녀 채용 특혜요구 문제도 좀 그렇다. 많은 사업장에서 이미 소리없이 시행되고 있는 제도가 왜 유독 현대차 노동조합에서만 문제가 됐을까? 그나마 절반 가까운 조합원들이 그 조항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주목하고 그 절반 가까운 조합원들이 앞으로 더 많아지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비난의 목소리만 높았다.

생산직 노동자를 엄정하게 공채로 채용하는 기업체가 많지 않다. 상당수 사업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은 회사 관리자들의 추천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채용된다. 현장 초급 관리자들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용노조 간부까지 끼어들어 이권을 나누는 곳도 적지 않다. 흔히 ‘민주노조’라 불리는 노조가 활동하는 사업장에서 그런 통로로 취업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반노동조합 정서를 갖게 된다. 쟁의행위가 발생하면 취업할 때 끈이 돼 준 소개자들은 파업대오에서 조합원들을 빼내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불공정한 관행 침묵해선 안돼

현대차 노조처럼 단체협약에 명문화할 경우 주목을 받게 될까봐 이면합의로 시행하는 기업들도 많다. 더 심각한 경우는 노조 모르게 회사가 쉬쉬하면서 충성도 높은 직원 자녀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관행이 정착된 기업들이다. 그 혜택을 묵인한 노조가 어리석다고 탓하겠지만, 그에 맞서는 싸움을 할 수 있을 만큼 조직력이 있는 노조라면 처음부터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대차 노조의 자녀 채용 특혜요구는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비정규직 고통을 나몰라라하는 ‘정규직 세습’이라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러한 비난이 단체협약 해당 조항의 타결을 막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정의감에 가득찬 비난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입 닫고 있었던 우리들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하종강| ‘노동과 꿈’ 대표

[출처] 경향신문 / 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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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되살리는 SNS

읽을거리/사회 2011. 5. 10. 18:41
사회과학 200년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뭐라 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공동체가 사라지고 그 빈 자리를 어떻게 국가와 시장이 채워나가는가에 대한 기록이다”라고. 이렇게 보면 사회과학 내부 분파들 사이의 차이 정도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공동체를 몰아낸 자리에 들어선 시장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말하면 아담 스미스가 되고, 그것이 얼마나 계급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말하면 카를 마르크스가 된다. 국가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적 기구인지를 말하면 알튀세가 되고, 그것의 관료적 작동양상에 주목하면 막스 베버가 된다. 하지만 작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통점은 공동체가 사라지고 국가와 시장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내년 선거 ‘소셜 정치’ 뚜렷해질 것

‘나’와 ‘너’ 사이에 ‘우리’가 있다. 거기야말로 공동체의 자리이다. 공동체는 ‘나’와 ‘너’의 단순 합이 아니다. 시장이 갈라놓은 ‘나’와 ‘너’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가려는 이기적 개인들일 뿐이지만 ‘우리’는 미래와 환경과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우리 모두의 운명을 염려한다. 국가의 감시와 통제에 짓눌린 ‘나’와 ‘너’는 한없이 작은 납세자일 뿐이지만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국가를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같이 꾸는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공동체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소중하다.

나는 작년 11월 이 지면을 통해 트위터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경향신문 2010년 11월11일자 정동칼럼). 신자유주의 시장의 거센 파고와 지난 몇 년간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심각하게 후퇴시킨 국가의 강압 속에 멸종된 줄 알았던 ‘우리’가 트위터와 같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난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재·보선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내년 양대 선거에서는 더욱 커질 것이다. 되돌아온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정치적 공동체의 귀환이다. 내년 선거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소셜 선거가 될 것이고, 정치적 공동체가 멸종위기에 처한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던 사람들로서는 두려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표의 크기로 보면 최소 10퍼센트 내외의 유권자가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SNS ‘홍보’ 아닌 ‘소통의 장’ 돼야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끝자락을 감지한 것일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SNS를 활용해 정부정책을 홍보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하고, 며칠 전부터 트위터에 국무위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통위는 소셜플랫폼 전략이란 것을 발표하면서 이름도 어려운 ‘인포데믹스(왜곡된 정보의 확산)’를 차단하겠다고 나섰다. 천당 바로 아래에서 패배한 강재섭 후보의 “특히 SNS를 조심해야 한다”는 경험담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재·보선 선거운동이 시작될 무렵 20퍼센트 이상 앞선다고 조사되었던 강원도에서조차 패배한 것도 공포감을 키우는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SNS는 홍보의 장이 아니라 소통의 장이고, 인포데믹스가 아니라 집단지성의 장이며, 조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감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되살리고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부여당은 아직도 변화의 끝자락밖에 붙들지 못한 것이다. 불리하기 때문에 홍보와 규제와 차단을 하려 한다면 사태는 점점 더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자신들이 대표하도록 되어있는 유권자를 제대로 대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누누이 말하지만 정치와 권력이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않을 때 뉴미디어는 ‘대표되지 않은 자의 무기’가 된다. 트위터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정치가 마주해야 할 것은 어제의 패배적인 ‘너’와 ‘나’가 아니라 주권자의 자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한 ‘우리’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42105095&code=9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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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폐기’ 강력히 요구한다

읽을거리/사회 2011. 5. 10. 18:29
지난 1995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구환경정치론’이란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수업시간에 가장 심각하게 강조한 것은 핵발전소 문제다. 이 주제를 마무리할 때면 항상 ‘예언’한 것이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핵발전소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에서 일어날 확률이 아주 높다는 얘기였다. 삼풍백화점 및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보여줬듯이 한국이 거대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내 나름대로의 분석 때문이었다. 내 예측의 절반은 빗나가버렸다. 일본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폭발 및 붕괴 사건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일본의 기술과 관리능력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간 후쿠시마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과 담론이 쏟아져나왔지만 거기서 한국 사회는 별다른 ‘학습’을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핵발전소 폐쇄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어야 하는데 예상외로 조용하다. 기껏해야 핵발전소 21기의 안전문제를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 사회에서 ‘원자력’이라는 그럴 듯한 번역어로 포장된 ‘핵(nuclear)’에 대한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안면도·부안 등지에서 일어났던 방폐장 설치 반대운동이 그 근거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핵’에 대한 신화도 뿌리깊다. 핵무기가 있으면 왠지 든든하고 또한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핵무기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이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핵발전소에 대한 기대와 과신으로 이어져왔다. 이 뒤에 정부, 핵 관련 과학자·전문가 집단, 주류언론 간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동맹이 존재한다고 봐야 할까. 그 동맹에서 유포하고 있는 핵발전 관련 담론은 단순하다. 원자력은 ‘청정 에너지’이고 안전하며, 비용이 싸고 그것을 대체할 에너지가 현실적으로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믿음에는 과학적, 경제적 근거가 얼마나 있을까?

이필렬 교수의 지론처럼 핵발전소의 안전에 관련된 장치가 수없이 많다는 사실은 바로 그만큼 그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다. 비용이 싸다? 1㎾/h를 생산하는 데 드는 현재 비용은 원자력이 수력이나 화력에 비해 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비용에는 사용 후 폐연료 처리, 고준위와 중·저준위 폐기물 처리 및 저장(고준위 폐기물을 안전하게 영구히 저장하는 방법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수명이 다한 원자로 해체, 주변 환경 복구 비용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대형 사고로 인한 비용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재생에너지가 비현실적인 대안일까? 물론 단기간에 원자력을 재생에너지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수명이 다하는 대로 원자로를 하나하나 폐기한다면 장기간에 걸쳐 ‘탈핵사회’를 이루는 것은 가능하다. 산업화의 수준이 한국보다 결코 떨어질 리 없는 독일에서 2050년까지 현재 24.4%에 달하는 원자력 의존도를 0%로 떨어뜨리고 재생가능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83%까지 올리는 계획을 세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에 폭발 25주년을 맞은 체르노빌 발전소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현재 원자로를 봉인한 시멘트 덩어리에서 균열이 생겨나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또다시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80만명이 피폭된 체르노빌 사건에서 배우지 못한 것처럼 한국도 후쿠시마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일본의 반핵발전 시위에서 나왔던 구호가 머릿속을 맴돈다. “(원전 폐기를) 강력히, 강력히, 강력히 요구한다!”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81922325&code=9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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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권리’ 없는 사회

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38
이 땅의 아이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꼭 지켜줘야 할 권리가 있다. 방황할 권리, 실패할 권리다. 사람은 누구나 방황하고 좌절하면서 성장한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의 문턱에 오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실패에 대해서 가혹하다. 한 번 넘어지면 낙오자, 패배자가 되고 만다.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몇 해 전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참석해 자신의 도전과 실패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혼모였던 생모는 잡스를 대학에 보내주는 조건으로 양부모에게 맡겼다. 약속대로 양부모는 잡스를 대학에 보냈지만 잡스는 대학 교육이 어떤 도움이 될지 확신이 없다며 6개월 만에 자퇴했다. 그는 친구 집에서 잤고, 빈 콜라병을 모아 병당 5센트에 팔아서 먹을 것을 샀다. 공짜 밥을 먹기 위해 10㎞를 걸어 힌두교 교당까지 찾아갔다. 대신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 잡스가 매료된 것은 서체였다. 그는 매킨토시 컴퓨터가 미려한 서체를 가지게 된 것은 자신 덕분이라고 했다.

잡스가 늘 성공만 했던 것은 아니다. 창업 10년 만에 애플은 20억달러짜리 회사가 됐지만 잡스는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그가 영입한 동업자들과 불화가 생겼고, 이사진은 창업자인 잡스를 쫓아냈다. 잡스는 “돌아보면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다. 성공이라는 부담을 벗고 홀가분하게 초보자로 다시 돌아가 내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접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잡스는 이후 픽사를 창업했고 세계에서 가장 큰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는 잡스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아무리 창의적이고 천재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대학 중퇴자에게 밑천을 대줄 사람도, 아이디어를 사줄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떠받들고 있는 신념은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승자독식의 논리다. 개혁이란 이름을 내건 것들을 들여다보면 우수 인재, 좋은 성과를 위해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 일색이다. 그러다보니 초등학생도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열 살 때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대학이 결정된다는 무섭고 섬뜩한 말까지 나돈다. 부모들은 자식의 미래를 위한다며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뺑뺑이’ 돌린다. 중학교에서는 특목고 경쟁을 벌이고,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하면 취업원서조차 얻기 힘들다. 대학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보다 성적 우수자에게 장학금을 주고, 오갈 곳 없는 지방 학생 대신 성적 우수자에게 기숙사를 제공한다. 모든 것이 승자 우선이다.

이런 극심한 경쟁에서는 승자도 위태롭다. 올해 초 목숨을 끊은 카이스트 학생들도 고교 때까지는 모두 승자였을 것이다. 이들은 초·중학교에서 ‘경쟁의 사다리’ 맨 앞자리에 올라서 과학고에 진학한 수재였다. 로봇영재였다는 학생은 영어·수학 점수는 다른 학생보다 뒤질지 모르지만 로봇대회를 휩쓸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생에게 “늘 배고픈 채로, 늘 어리석은 채로 남으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한 번 실패에 낙오자가 되기 십상인 사회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것은 ‘실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두 번 세 번 도전할 기회가 없다면 누가 실패를 무릅쓰고 어려운 길, 배고픈 길을 갈 것인가. 도전은커녕 모두가 이기는 길, 안전한 길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는 방황과 실패도 권리여야 한다. 방황과 실패가 트라우마가 아닌 인생의 자산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최병준|사회부 차장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42121475&code=9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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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그림’으로 대변되는 언론·표현의 자유

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34
최근 국제언론자유 감시단체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가 세계 각국의 언론자유 수준을 조사해 ‘2011년 언론자유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한국을 부분적 언론 자유국(partly free)으로 평가했다. 한국은 지난 2009년에는 언론자유국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올해 조사에서는 부분적 언론 자유국으로 그 지위가 떨어졌다. 이는 한국의 언론 자유가 2009년 이후 후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리덤 하우스의 ‘2011년 언론자유 보고서’는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보인 나라로 한국과 태국을 꼽았다. 보고서는 한국이 그동안 언론자유국으로 분류돼 있다가 이번에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강등됐다고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가장 먼저 정부의 검열과 감시 증가로 언론매체의 뉴스와 정보 콘텐츠에 대해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온라인상에서 반정부적 시각의 글들이 본인의 동의 없이 삭제돼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보수성향의 이명박 정부가 언론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측근들을 주요 방송사 사장에 임명해 방송사 경영에 개입함으로써 언론자유를 침해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번 ‘2011년 언론자유 보고서’의 국가별 평가내용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언론자유 지수는 조사 대상 196개국 중 70위를 차지해 동유럽의 체코, 폴란드, 헝가리, 남미의 우루과이와 칠레,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더 낮은 수준이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기준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장한 국가라도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를 민주국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다양한 형태로 침해를 당하고 있다. 지난해 G20 정상회담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은 한 대학강사가 검찰에 의해 기소돼 징역 10월을 구형받았다. 검찰은 피고인에게 실형을 구형하면서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했다”며 엄중처벌을 요구했다고 한다.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은 것이 어떻게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했다는 것인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필자는 쥐 그림을 그려넣은 포스터를 보면서 기발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당했다는 생각은 단 1%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해봤다. 만약 그 대학강사가 G20 홍보포스터에 쥐가 아닌 토끼나 강아지 등 다른 동물의 그림을 그려넣었어도 검찰이 기소에 실형까지 구형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같은 대학에 재직 중인 미국인 교수들에게 얘기를 해주고 의견을 물었다. 모든 교수들이 포스터에 그림을 그려넣었다는 이유로 검찰이 기소를 하고 실형까지 구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놀라워했다. 미국의 코미디언과 방송 진행자들은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유력 정치인들과 정부정책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과 풍자를 쏟아낸다. 그러나 누구도 그 비판과 풍자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말로만 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표현과 언론의 자유 보장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정부당국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최진봉| 텍사스주립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51929065&code=9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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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사다

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33
어제 서울중앙지검이 농협 전산망 마비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담당 부장검사인 첨단범죄수사2부장이 6층 브리핑실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곁들여 설명했다. 사진·방송카메라 촬영도 허용했다. 배포한 보도참고자료는 ‘용어 설명’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미장센’(무대장치·조명 등에 관한 총체적 계획)에 비해 결론은 시원치 않았다. 검찰은 “북한에 의한 새로운 사이버 테러”라고 하면서도, 구체적 근거에 대해선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이라 밝히기 곤란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저께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와 관련, 대주주 등 21명을 기소했다. 중수부는 세 가지 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다양한 그래픽을 담은 21쪽짜리 설명자료에 3쪽짜리 ‘피고인별 공소사실 요지’, 5쪽짜리 ‘SPC(특수목적법인) 운영현황’까지 내놨다. 내용은 몰라도 형식은 ‘프레스 프렌들리’였다.

지난달 15일 서울중앙지검이 한상률 전 국세청장 관련 의혹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는 조금 달랐다. 브리핑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2시30분, 3차장검사 사무실에서 티타임 형식으로 이뤄졌다. 보도자료 한 장 주지 않고, 사진·방송 촬영도 사절했다. 브리핑 말미엔 이런 문답이 오갔다. 앞의 질문은 기자, 뒤의 답변은 3차장검사가 한 말이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건도 카메라 돌아가고(촬영하고) 하는데, 이렇게 티타임 형식으로 하는 이유는 뭔가.” “나도 제대로 된 사건으로 (브리핑)하고 싶다.”

“전직 국세청장이 기업에서 돈 받았다면 중요한 사안인데.” “글쎄.”

“금요일 오후에 발표한 이유는 뭔가.” “굳이 금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없다.”

유리하면 ‘확대’ 불리하면 ‘축소’

검찰의 의도는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발표는 하지만 관심은 갖지 말아달라…. 일부 개인비리만 인정해 불구속 기소하고, 권력형 비리엔 모두 면죄부를 준 채 어물쩍 수사를 종결하려니 계면쩍었을 터다. 딱딱한 뉴스가 잘 먹히지 않는 주말,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한상률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서 ‘한상률’은 조용히 잊혀졌다.

한상률 사건 수사결과가 발표된 날, 조현오 경찰청장의 서면진술서가 검찰에 도착했다. 조 청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가 지난해 8월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됐다. 검찰은 조 청장에 대한 조사를 8개월간 미뤘다. 주임검사는 사건을 그대로 쥐고 있다가 지난 2월 정기인사 때 다른 곳으로 옮겼다. 노무현재단이 해당 검사를 직무유기죄로 고발한 뒤에야 검찰은 “조 청장으로부터 서면진술서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1995년 6년차 기자 때 처음 접한 검찰이나 16년 후 데스크가 되어 바라본 검찰이나 다른 것이 없다. 조직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정권의 뜻에 민감한 속성은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검찰은 변하지 않는다고, 시민이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검찰의 기소권은 시민이 편의상 위임한 것이지, 검사들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는 최근 대검 중수부의 수사권 폐지와 특별수사청 설치 등 검찰 개혁안 처리를 6월 임시국회로 넘겼다. 수뇌부 집단사퇴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반발하던 검찰은 안도했다. 참다못한 시민사회는 “더 이상 검찰 개혁을 국회에만 맡길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115개 시민사회단체가 ‘사법개혁 촉구 인권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이제,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후퇴하지 않으려면,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다. 단순히 중수부 수사권 폐지나 특별수사청 설치 등 한정된 의제를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넓게 검찰 개혁을 논의해야 한다. 검찰 권한을 지역·기능에 따라 분산시키는 방안, 일부 간부를 선거로 뽑아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 법무장관 등 법무부 주요 간부에 비검찰 출신 법률전문가를 기용하는 방안 등도 검토할 수 있다.

요즘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인기다. ‘가수는 가창력으로 말한다’는, 당연하지만 현실에서 외면당해온 명제가 명제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검사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 서초동에 있는가.

김민아 사회부장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31856055&code=9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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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새로운 각성 보여주는 ‘통신생협’

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29
인천의 시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휴대폰 통신비의 불합리한 시장구조를 혁신하려는 대안운동에 나섰다고 한다. 오는 16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통신 소비자생활협동조합(통신생협)’이 공식 출범할 예정이라는 보도다. 통신 3사의 독과점 구조에서 잃어버린 소비자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피켓을 드는 대신 생협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구상이다. 통신생협은 식품·의료 부문에서 세를 넓혀온 생협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확산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통신생협 준비위원회는 기존 통신비를 30~40%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생협이 나서 불필요한 통신서비스의 거품을 걷어내고 통신 3사와 공공구매·직거래를 터 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항의하거나 불매하는 기존 소비자운동과 달리 경제행위를 통해 ‘시민 소비자’의 욕구를 해결하는 생협의 방식이라면 기대해 볼 만한 목표다. 2004년 이탈리아에서 생협이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맞서 반값 분유를 시장에 내놓았고, 1970년대 일본에서 컬러TV에 잔뜩 낀 가격 거품을 걷어낸 일등공신이 생협이었다.

통신생협는 태동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자율과 자립, 자조와 협동의 원리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의 대안적 영역인 생협에 대해 시민의 눈길이 쏠리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불편한 현실을 개탄만 해선 안되겠다는 시민의 새로운 자각과 생협에 대한 재발견이 맞물린 결과라 할 수 있다. 최근 젊은 인디 음악인들이 대자본이 쥐락펴락하는 음악시장에 맞서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을 만든 것이나 협동조합에 뿌리를 둔 사회적 기업의 창업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해법 모색이 본격화한 것이다.
 
주주의 지갑이 아니라 공동체의 부를 늘리는 협동조합이 활발할수록 시장은 안정되고 민주주의와 공동체는 강화되며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건 입증된 사실이다.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하나같이 생협 천국이고, 미국조차 각종 협동조합의 조합원 수가 1억2000만명에 달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생협 조합원 수는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시민의 경제·사회·문화적 욕구 충족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서도 생협은 더 많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 통신생협을 계기로 우리나라 생협운동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출처]경향신문 2001년 5월 5일자 사설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52055325&code=9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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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 "20대 투표율 50% 등록금 반값 이룬다"

읽을거리/사회 2011. 5. 4. 17:49
어젯밤 이화여대에서 진행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좌에 참석하였습니다. 20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취업’을 주제로 3가지 질문이 던져졌고, 스님의 열정적인 답변에 감화받은 300여명의 대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내었습니다. 마침 시사인 고재열 기자님과 연예인 김제동씨도 강의를 들으러 오셨길래 인증샷도 함께 찍는 행운을 누렸답니다.^^ 청춘들의 진심어린 고뇌와 법륜스님의 열정적이고 지혜로운 답변의 그 현장을 여러분들게 소개합니다.
 
▶질문자 : 27살의 직장인이면서 학생입니다. 이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에 들어갔는데 연봉도 작고 멀티플레이어를 요구해서 능력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해서 심리학을 공부하는데, 이것은 대학만 나오면 안되고 석사까지 해야합니다. 석사를 하자니 학비도 부담되고 서른 살이 넘는 나이가 부담이었습니다. 현실과 타협해서 이직을 생각했고, 가고 싶은 기업이 있는데 대기업입니다. 그런데 스펙이 발목을 잡습니다. 학벌도 별로고, 집에 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학연수를 가본 적도 없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나보다 스펙 높고 나이 어린 애들이 수두룩한데,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너무 가고 싶으니 해보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격지심과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긍정적으로 이직준비를 할 수 있을지요? 

▶법륜스님 : 위로를 해드려야겠지만 위로한다고 인생이 변하지는 않는다. 따끔하게 말해 드리자면, 그런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이 말은 학력이 부족하고 재능이 부족한 걸 말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마음이 약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으로는 아무 일도 하기 어렵다. 죽을 때까지 늘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생을 마치게 된다. 가을바람에 떠도는 낙엽과 같다. 낙엽이 자기가 스스로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바람이 멈추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늘 휘날리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 남이 대학 가니까 나도 대학 가고, 남이 결혼하니까 나도 결혼하게 되고, 남이 차 사면 나도 사야하고... 이런 식으로 가을바람에 휘둘리는 낙엽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암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인생이 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인기가 많다든지, 돈이 많다든지 하는 사람들도 속을 들여다보면 거품 같은 존재들이다. 거기에 여러분이 눈이 멀어서 따라가기 바쁘다.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두 발로 땅을 딛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라.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두 발로 땅을 딛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지, 휘둘려서 정신없이 사는 것은 산다고 할 수 없다. 종노릇을 하지 말고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존재가 되지 말고, 세상을 굴리는 존재가 되라는 말이다. 

세상에 굴림을 당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굴리는 자가 되라.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 굴림을 당한다. 남을 따라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러지 말고 내가 세상을 굴리는 자가 되어라. 남이 다 차를 사더라도 내게 필요가 없으면 안사는 지조가 있어야 한다. 가까운 거리도 차타고 가고, 운동 부족이라며 안가는 자전거를 헬스클럽에서 죽어라 탄다. 이것은 잘못이다. 세상이 어떻게 가든 자기 눈이 있어야 한다. 없어서 안 쓰는 것은 극빈이지만, 있는데도 안 쓰면 청빈이라 한다. 자발적인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20대 청춘이 벌써부터 그렇게 비굴해지면 어떻하냐.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어있다. 중소기업에 취직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작은 회사에서 온갖 것을 다 경험해보기 때문에 나중에 창업할 때 유리하다. 인생은 꼭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게 아니다. 20대인 여러분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도 좋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혼자 시작하기는 뭐하니까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좀 배워서 시도해볼 수도 있다. 

억지로 공부하지 마라, 살아있는 공부를 해라. 

영어 잘한다고 취직될 줄 아는가. 미국에서는 노숙자도 영어 잘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두 발로 딛고 자기 두 눈으로 보는 것이다. 지식은 자기 것이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유치원부터 억지로 공부한다. 논문 쓰기 힘들다고 하는데 굳이 힘들어 하면서 왜 하는가. 유학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 보내주면 얼마나 좋은가. 그게 왜 괴로울 일인가. 국가와 부모 돈 가지고 가서 공부하면서 왜 괴로운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인생을 그렇게 억지로 산다. 이런 공부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공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연애를 할 때 저 인간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아침 저녁으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왜 그런지, 이런 걸 연구하면 그것이 심리학이다. 

밥벌이로 위대해진 사람은 없다. 자기가 좋아서 해라. 

물결에 휩쓸려가는 나무토막처럼 인생을 살면 안 된다. 휩쓸려가는 것이 버티기보다 쉽지만 그것은 부평초 같은 인생이다. 심리학을 하려면 대학에서 기초를 배우고, 나머지는 창조하고, 오히려 동양의 직관을 배워라. 밥벌이로 하려 하지 마라. 밥벌이 삼아 돈을 얼마 받겠다는 생각으로 위대해진 사람은 없다. 유명한 화가 중에 밥벌이로 해서 위대해진 사람이 있는가. 자기가 좋아서 한 사람들이다. 미국 초기 유학생들은 다 접시 닦으며 공부했다. 여러분은 하는 공부는 억지 공부이다.

취직이 안된다면 이런 기회에 봉사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면 어떤가. 

여러분은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취직이 안 된다. 첨단산업이라는 새로운 것으로 문제를 푼다지만, 이 수요를 다 맞출 수 없다. 물가는 오르고 살기 힘든데 국가는 성장한다고 하니 양극화는 심해진다. 재벌기업이 정부를 움직이기 때문에 시정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개인이 풀기 힘들긴 하지만 완화시키기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한 문제이다. 사회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역량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 속에서 개인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한없이 높은 자리 좋은 직장을 추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 못한다. 불만족스럽더라도 직장을 가지고 해야 한다. 부모에 의탁해서 원서만 몇 십군데 내는 것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모에게 의지해도 될 형편이면 오히려 이런 기회에 봉사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면 집에 빚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의 발상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우리가 만들자. 그것이 희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살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지 아무도 만들어줄 사람은 없다. 우리들 개개인의 긍정적 자세와 도전하는 자세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힘을 합쳐서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것이 희망이다. 민주화가 청년에게 희망이었듯이,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여러분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개인이 어디 취업하는 것만이 꿈과 희망이 아니다. 희망이 있으면 잠 못 자고 밥 못 먹어도 눈이 반짝한다. 도전의식이 있을 때 그렇다. 긍정적으로 보고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강의 시작 전 위축되어 있던 마음들이 조금씩 환하게 밝아지더니 끝날 때는 활기찬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갈수록 오르고, 취업도 안되고, 취업을 하더라도 각종 스트레스로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 청춘입니다. 하지만 스님과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으며 무거웠던 마음은 조금씩 밝아져만 갑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좋은 분위기에서 갑자기 깜짝 등장하는 인물이 있어 청중들을 모두 놀라게 했답니다. 바로 앞자리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들으셨다는 김제동씨입니다. 김제동씨의 강의 소감도 열렬한 환호를 받았답니다. 김제동씨의 소감을 끝으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현장 이야기를 임팩트 있게 마칠까 합니다.^^ 
 
▶김제동 : 여러분들의 질문 속에 제 모습이 다 있고 충분히 공감했다. 지금 직장도 있지만 더 좋은 직장을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렇다 공감되었다. 지금 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있지만 더 좋은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다는 끊임없는 불안이 있다. 방송국에 들어올 때 뛸 듯이 기뻤지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어떻게 난도질될까에 신경 써서 실제로 내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늘 그들이 사는 세상에 내가 살아서 그랬다.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던 순간이 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뿐더러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무대에 올라서면 늘 떨리지만 어느 순간 떨림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카메라 빨간불을 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보는 토크 콘서트를 하면서 자리를 찾았다. 녹화된 비디오를 보면서 소름이 돋는다.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했을까. 남을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가능했다. 

20대 투표율 50%이면 등록금 50% 이뤄진다.

예전에는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는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못 해 미안하다. 더 이상 정치 놀음에 굴림 당하지 말고 20대 투표율 50% 되면 등록금 50% 깎인다. 투표율 100%가 되면 여러분 전액 무료로 대학 다닐 수 있다. 이런 말씀 드리는 이유는 제 이기심 때문이다. 제 아이는 싼 값에 교육받기 위해서다. 여러분 시대에는 더 이상 아버지가 장관이 아니라서 특채를 못시키는 것은 하지 말자. 그들이 만든 나라에서 살지 마시고, 그들이 만든 대학에서 공부하지 마시고, 우리가 만든 대학에서, 우리가 만든 나라에서 살아봅시다. 여러분을 지지하는 저같은 사람이 있으니, 여러분이 만들고 싶은 나라 만들 때 앞장서지 못하더라도 함께 서 있겠다. (박수) 

[출처] 희망플래너 / 원문 링크 : http://hopeplanner.tistory.com/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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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병원을 경계한다

읽을거리/사회 2011. 5. 4. 17:33
많은 이에게 선망의 대상인 미국이 우리보다 못한 분야는 바로 의료보험이다. 수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의료보험 없이 살고 있고, 그러다보니 손가락 곪은 걸 돈을 들여 치료하느니 그냥 잘라 버리는 길을 선택하는 게 그네들의 실상이란다. 전체 병원의 93%가 민간병원인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이 땅의 모든 병원은 죄다 국민건강보험과만 계약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당연지정제’ 덕분이다.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면, 이 건강보험이 굉장히 좋은 보험이라는 것.

내가 의료보험료로 2만원을 낸다고 해보자. 그러면 건강보험법에 따라 나를 고용한 직장에서도 똑같이 2만원을 부담해 주고, 정부는 이 둘을 합친 4만원의 20%, 그러니까 8000원을 내준다. 자기가 낸 보험료의 2.4배가 보험료로 적립되는 셈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걷은 보험료 중 국민들의 의료비로 지출하는 비율, 즉 급여율이 100%가 넘는다. 직원들 월급도 주고 이익도 내야 하는 민간보험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수치로, 2006년만 봐도 급여율이 무려 114%에 달한다. 이러니 건강보험이 적자가 날 수밖에. 보험료를 올려도 적자가 계속되는 이유는 돈이 생기면 생길수록 또 다른 서비스를 해주기 때문인데, 2010년 보험료가 4.9% 오른 대신 뇌혈관질환 등 9가지 질환에 대한 보험적용이 확대된 게 그 한 예다. 다른 세금과 달리 건강보험료 인상엔 너그러워도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 건강보험이 부자들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제도라는 것. 건강보험료의 책정이 소득에 따라 누진적으로 결정되는 탓에 일반 서민들은 자기가 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받는 반면 부자들은 비싼 보험료를 내면서도 별반 대접을 못 받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황금알을 낳는 의료시장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민간보험사들도 건강보험이 밉고, 의사들도 건강보험이 정한 낮은 수가가 탐탁지 않다. 사정이 이러니 가진 자들을 유난히 배려하는 현 정권으로선 건강보험의 틀을 무너뜨려야 할 동기가 생기게 마련이다.

“정부는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병원을 시범 도입한 후 전국 확대 여부를 논의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4월28일자, 경향신문)

영리병원은 말 그대로 영리를 위한 병원이다. 이게 생기고 나면 수익을 낼 수 있는 비보험진료에 집중할 테고, 궁극적으로는 수가가 싼 건강보험 대신 돈을 많이 주는 민간보험사와 계약하려 할 것이다. 건강보험의 핵심 틀인 당연지정제가 깨진다는 얘기다. 한 번 물꼬가 트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지게 마련이어서, 나중엔 삼성병원이나 아산병원에 가려면 지금보다 10배 이상의 돈을 줘야 가능할 것이다. 이런 비난을 의식한 보건복지부는 “영리병원 도입의 전제조건은 당연지정제 유지”라고 둘러대지만, 그게 말이 안된다는 건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터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당연지정제는 저절로 폐지될 수밖에 없다.”

경만호 대한의사협회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얘기다. 물론 그는 당연지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쪽이지만, 그의 발언에는 복지부가 숨기려던 진실이 담겨 있다.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정형근은 이렇게 말했다. “영리병원을 허용한다면 건강보험은 뿌리째 흔들릴 것이 뻔하다.” 그러면서 그는 영리병원에 대한 반대의견을 거듭 천명했는데, 살아생전 내가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정형근의 의견에 동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안기부의 저승사자였던 정형근도 반대하는 영리병원이니, 얼마나 무서운 병원이겠는가? 영리병원을 경계해야 할 이유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출처] 경향신문 /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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