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검사다
읽을거리/사회 2011. 5. 9. 19:33
어제 서울중앙지검이 농협 전산망 마비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담당 부장검사인 첨단범죄수사2부장이 6층 브리핑실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곁들여 설명했다. 사진·방송카메라 촬영도 허용했다. 배포한 보도참고자료는 ‘용어 설명’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미장센’(무대장치·조명 등에 관한 총체적 계획)에 비해 결론은 시원치 않았다. 검찰은 “북한에 의한 새로운 사이버 테러”라고 하면서도, 구체적 근거에 대해선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이라 밝히기 곤란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저께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와 관련, 대주주 등 21명을 기소했다. 중수부는 세 가지 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다양한 그래픽을 담은 21쪽짜리 설명자료에 3쪽짜리 ‘피고인별 공소사실 요지’, 5쪽짜리 ‘SPC(특수목적법인) 운영현황’까지 내놨다. 내용은 몰라도 형식은 ‘프레스 프렌들리’였다.
지난달 15일 서울중앙지검이 한상률 전 국세청장 관련 의혹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는 조금 달랐다. 브리핑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2시30분, 3차장검사 사무실에서 티타임 형식으로 이뤄졌다. 보도자료 한 장 주지 않고, 사진·방송 촬영도 사절했다. 브리핑 말미엔 이런 문답이 오갔다. 앞의 질문은 기자, 뒤의 답변은 3차장검사가 한 말이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건도 카메라 돌아가고(촬영하고) 하는데, 이렇게 티타임 형식으로 하는 이유는 뭔가.” “나도 제대로 된 사건으로 (브리핑)하고 싶다.”
“전직 국세청장이 기업에서 돈 받았다면 중요한 사안인데.” “글쎄.”
“금요일 오후에 발표한 이유는 뭔가.” “굳이 금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없다.”
유리하면 ‘확대’ 불리하면 ‘축소’
검찰의 의도는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발표는 하지만 관심은 갖지 말아달라…. 일부 개인비리만 인정해 불구속 기소하고, 권력형 비리엔 모두 면죄부를 준 채 어물쩍 수사를 종결하려니 계면쩍었을 터다. 딱딱한 뉴스가 잘 먹히지 않는 주말,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한상률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서 ‘한상률’은 조용히 잊혀졌다.
한상률 사건 수사결과가 발표된 날, 조현오 경찰청장의 서면진술서가 검찰에 도착했다. 조 청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가 지난해 8월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됐다. 검찰은 조 청장에 대한 조사를 8개월간 미뤘다. 주임검사는 사건을 그대로 쥐고 있다가 지난 2월 정기인사 때 다른 곳으로 옮겼다. 노무현재단이 해당 검사를 직무유기죄로 고발한 뒤에야 검찰은 “조 청장으로부터 서면진술서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1995년 6년차 기자 때 처음 접한 검찰이나 16년 후 데스크가 되어 바라본 검찰이나 다른 것이 없다. 조직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정권의 뜻에 민감한 속성은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검찰은 변하지 않는다고, 시민이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검찰의 기소권은 시민이 편의상 위임한 것이지, 검사들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는 최근 대검 중수부의 수사권 폐지와 특별수사청 설치 등 검찰 개혁안 처리를 6월 임시국회로 넘겼다. 수뇌부 집단사퇴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반발하던 검찰은 안도했다. 참다못한 시민사회는 “더 이상 검찰 개혁을 국회에만 맡길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115개 시민사회단체가 ‘사법개혁 촉구 인권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이제,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후퇴하지 않으려면,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다. 단순히 중수부 수사권 폐지나 특별수사청 설치 등 한정된 의제를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넓게 검찰 개혁을 논의해야 한다. 검찰 권한을 지역·기능에 따라 분산시키는 방안, 일부 간부를 선거로 뽑아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 법무장관 등 법무부 주요 간부에 비검찰 출신 법률전문가를 기용하는 방안 등도 검토할 수 있다.
요즘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인기다. ‘가수는 가창력으로 말한다’는, 당연하지만 현실에서 외면당해온 명제가 명제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검사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 서초동에 있는가.
김민아 사회부장
[출처] 경향신문
원문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03185605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