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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10 "노래에 깊이가 없네요"라는 평가의 가혹함
  2. 2011.05.10 ‘대국민투표’의 재미?!

"노래에 깊이가 없네요"라는 평가의 가혹함

읽을거리/예술/대중문화 2011. 5. 10. 18:48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는 예술과 현실의 모순적 관계를 예리하게 간파한 소설이다. 소묘를 잘 그리는 한 유망한 젊은 여성 예술가는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비평을 듣는다. "당신의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깊이가 아직 부족합니다." 평론가는 단지 그녀를 북돋아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 평론가의 비평을 되새김질하듯, '깊이가 없다'는 점에 대해 떠들어댔다. 힘들어하던 그녀는 자신에게 없다는 그 '깊이'를 찾으려고 고뇌하다 결국 139m 방송탑 위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 도대체 그녀가 찾던 '깊이'의 실체는 뭘까?

예술의 본질은 주관적이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다. 재즈는 좋지만 클래식은 별로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림도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고, 호불호(好不好)도 갈린다. 사실 예술 비평은, 주관적인 감성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 평론가 역시 주관적인 감정을 들이댄 것일 뿐이다. 하지만 평론가의 주관적 견해가 대중을 통해 객관적인 것처럼 확대해석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것이 대중문화의 함정이다.

물론 평론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예술 작품도 그것을 역사적·문화적으로 다듬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과 소통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생산적인 비평'과 '주관적 견해의 배설'은 다르다. 소설 내용처럼 악의는 없었지만, 깊은 고민 없이 나온 평론이 때로는 한 예술가를 극단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바야흐로 오디션 프로그램 전성시대다. 아마추어는 물론, 기존 프로페셔널들까지 분야를 넘어 새로운 도전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퍼포먼스에는 갖가지 평가들이 난무하며 인터넷을 달군다. 숨겨진 원석을 찾아 아름답게 다듬거나, 좀 더 탁월한 공연을 위한 비평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가끔 "○○씨의 노래는 그 무언가가 없어요"와 같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평가를 접할 때마다 씁쓸해진다. 그 '깊이에의 강요'가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헤어나지 못할 늪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주관'의 영역인 예술에 대한 비평은, 그것이 최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일 때 생산적일 수 있다. 경험을 통해 대중문화의 명암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의 좀 더 세심한 배려를 기대한다. 

김주헌 前 UNEP 컨설턴트

[출처] 조선일보 / 원문 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09/20110509019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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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투표’의 재미?!

읽을거리/예술/대중문화 2011. 5. 10. 18:45
2001년, 영화 <친구>가 한국 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할 때였다. 일간지 영화 담당 기자를 하면서 이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를 짚어보는 기사를 썼다. 교복 세대의 향수를 자극했네, 불행한 성장기를 위로하네…. 지금 보면 하나마나한 소리 같은데 반응이 컸다. 문화면 기사는 좀처럼 안 읽던 정치부 선배부터 시작해 꽤 많은 이들이 그 기사를 얘기했다. ‘이런 기사 좋아들 하는구나!’ 이런 기사? 대중들이 뭘, 왜 좋아하느냐에 관한 기사 말이다. 다들 대중이면서도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궁금해하는구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자기와 동시대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겠지. 너무 거창한가? 그렇지. 대중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성공할 것 아닌가. 대중의 취향이 구매력과 연결되면 영화든 책이든 대박 나는 것이고, 선거와 연결되면 권력을 잡는 건데. 그러고 보니 대중이 대중을 궁금해한다는 게 당연한 말이네. 정치부 선배도 관심 가질 만했네. 
그런데 또 이상한 게, 대중의 취향이나 기호는 얼마나 빨리 바뀌던가. <친구> 이후로 나왔던, ‘교복 세대의 향수’에 호소하는 영화들 대다수가 실패하지 않았던가. 영화 기획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중의 취향을 맞추는 건,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비슷하게 힘들다. 어찌 보면 대중, 그 무차별한 집단의 기호를 정확히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닐까. 장님 코끼리 만지듯 자기 경험치 안에서 판단해 놓고 어쩌다 그게 맞으면 그저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일 아닐까. 

여하튼 언론은 블록버스터 영화, 베스트셀러 서적뿐 아니라, 어떤 이슈에 대해서도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몰리면 그 이유를 짚는 기사를 꼭 내보낸다. 그런데 또 그런 기사치고 잘 썼다 싶은 게 없다. 얼마 전 서태지·이지아의 이혼 사실이 알려져 난리가 났을 때도 그랬다. 대중들이 왜 광분하는지 매체마다 기사를 썼는데 그게 다 하나마나한 소리 같았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된다. 대중이 대중을 궁금해하는데, 대중을 알기란 정말 어렵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래서 더?) 대중은 대중을 궁금해한다. 

문화방송의 가수 오디션 프로 <위대한 탄생>엔 ‘대국민투표’가 나온다. 여기서 ‘대’자가 ‘對’인지 ‘大’인지,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은데, 시청자 투표를 하고 그 결과를 70% 반영해 당락을 정한다. 이 프로뿐 아니라 <슈퍼스타 케이> <오페라 스타> 등 시청자 투표를 하는 프로가 최근에 부쩍 늘었고 모두 인기도 좋다. 

그런데 보자. 오디션 프로의 생명은 룰의 공정함이다. 시청자 투표가 과연 공정한가? 이 투표엔 노래 실력 말고도 오만가지 변수가 다 끼어들 거다. 잘생겨서 찍고, 거꾸로 예뻐서 안 찍고, 사연이 딱해서 찍고, 거꾸로 부잣집 자식에 공부도 잘해서 찍고, 출신 지역이 같아서 찍고, 친구가 찍으라고 해서 찍고…. <위대한 탄생>의 최근 투표 결과를 두고, 사정 딱한 이들한테 밀려 노래 잘하는 이들이 떨어졌다는 둥, 예쁜 여자들부터 떨어졌다는 둥 이런저런 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투표 결과엔 모두 승복한다. 많은 대중이 뽑았다면, 어쨌든 대중성은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또다른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아! 대중들은 저런 얼굴을 좋아하는구나! 저런 사연을 딛고 일어서는 드라마를 원하는구나! 아까도 말했듯이, 대중에게 대중은 끝없이 궁금한 존재 아니던가. 

미국의 시청자 투표 오디션 프로 <아메리칸 아이돌>에 대해 미국의 한 매체는 “매년 1등 한 이들이 음반 차트와 여러 시상식을 석권하고 있으니, 시청자 투표 방식이야말로 공정하고 유효하다”고 썼다. 한국은 아직 이런 오디션 프로에서 1등 한 이들이 상업성까지 거머쥐는 성취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여하튼 이 시청자 투표 방식이라는 게 묘하게 다가온다. 투표에 일정한 기준도 없고, 자기 기대치를 배신해도 순종하게 되고 마는 요상한 결과물, 즉 대중성이라는 요상한 동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지켜보는 게, 이들 프로의 또다른 재미 아닐까.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출처] 한겨레 / 원문 링크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67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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